詩의香氣

그녀의 서가書架

湖月, 2022. 4. 18. 18:48

그녀의 서가(書架)

 

                                 배한봉

 

 

세상에는 불타올라도 타지 않는

서가(書架)가 있다타오르면서도 풀잎 하나

태우지 않는 화염도 있다

나는 저 불꽃의 마음 읽으려고

그렁거리는 차를 몰고 7시간이나 달려왔다

층 층 만 권의 책을 쌓아올린 채석강 단애

한때는 사나운 짐승처럼 시퍼런 칼날

튀어나오던 삶이었겠다

그럼에도 벼랑에만 매달려 사는

가마우지 새에게 만은 둥지를 허락하는 여자였겠다

악다구니 쏟으면서그게 가난에게 내지르는

주먹질이란 걸 알았던 것일까

가파를수록 정 많고 눈물 많은 달동네

노을의 그 지독한 핏빛

아 나는 기껏 몇 권의 습작 노트를 불태우고

한 세계를 잃은 듯 운 적이 있단 말인가

이제는 저렇게 불타올라도 용암처럼 들끓지 않는

그녀의 삶삶의 문장으로 채워진 만 권의 책

오늘은 내가 가마우지새 되어

그녀의 서가에 한 권 책으로 꽂힌다

미친 힘으로 벼랑 핥는 파도도

바다의 불꽃으로 피어나고

비루한 삶의 풍경에 까지 층층 겹겹

한 살림 불의 문장을 새겨주는 채석강 노을.

 

시집 육탁』 2022. 여우난골

 

 





배한봉 시인

 

경남 함안에서 태어났다경희대 문학박사.

1998년 현대시』 등단.

시집 주남지의 새들』 『복사꽃 아래 천년소월시문학상 수상작품집』 『잠을 두드리는 물의 노래』 『악기점』 『우포늪 왁새』 『黑鳥가 있다.

현대시작품상〉 〈소월시문학상〉 〈박인환문학상〉 〈김달진창원문학상〉 〈경남문학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