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의香氣

꽃멀미 ㅡ 김충규

湖月, 2009. 2. 13. 22:24

 

    꽃멀미  

 

김충규 

 

새가 숨어 우는 줄 알았는데

나무에 핀 꽃들이 울고 있었다

화병에 꽂으려고 가지를 꺾으려다가

그 마음을 뚝 꺾어버렸다

피 흘리지 않는 마음, 버릴 데가 없다

나무의 그늘에 앉아 꽃 냄새를 맡았다

마음속엔 분화구처럼 움푹 팬 곳이 여럿 있었다

내 몸속에서 흘러내린 어둠이 파놓은 자리,

오랜 시간과 함께 응어리처럼 굳어버린 자국들

그 자국들을 무엇으로도 메울 수 없을 때

깊고 아린 한숨만 쏟아져 나왔다

꽃 냄새를 맡은 새의 울음에선 순한 냄새가 났다

그 냄새의 힘으로 새는

사나흘쯤 굶어도 어지러워하지 않고

뻑뻑한 하늘의 밀도를 견뎌내며 전진할 것이다

왜 나는 꽃 냄새를 맡고 어지러워

일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그늘에 누워

올려다보는 하늘에는 구름이 이동하고 있었다

구름이 머물렀던 자리가 움푹 패어,

그 자리에 햇살들이 피라미처럼 와글와글

꼬리를 치며 놀고 있었다

아니, 황금의 등을 가진 고래 한 마리가

물결 사이 출렁거리고 있었다

마흔도 되기 전에, 내 눈엔 벌써

헛것이 보이기 시작하는 걸까

사후(死後)의 어느 한적한 오후에

이승으로 유배 와 꽃멀미를 하는 기분,

저승의 가장 잔혹한 유배는

자신이 살았던 이승의 시간들을 다시금

더듬어보게 하는 것일지도 몰라, 중얼거리며

이 꽃 냄새, 이 황홀한 꽃의 내장,

사후에는 기억하지 말자고

진저리를 쳤다


 

 

 

 

 


*2004년 월간 『현대문학』1월호 발표

*2004년 『현장비평가가 뽑은 올해의 좋은 시』선정(현대문학사)

*2005년 『시인의 눈』창간호 '올해의 좋은 시 20선' 선정(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2006년 시집 『물 위에 찍힌 발자국』수록

*2007년 앤솔러지 『21세기, 우리 시의 미래  ( 실천문학사)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