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흙
전남진
3호선에서 2호선으로
2호선에서 3호선으로
갈아탈 전철을 향해 흘러가는 사람들 속에
자갈처럼 물살을 가르며 늙은 여인이 앉아 있다
검은 흙이 묻은 더덕을 자루에서 꺼내
신문지 위에 올려놓고 있다
지하통로를 물들이는 더덕 내음
그중 허리가 끊어진 더덕 한 뿌리
하얀 살을 들킨 더덕 한 뿌리
저 눈부신 속살을 키워냈을 검은 흙
물기를 잃고 더덕에서 떨어진다
빗지 않은 머리카락
검은 흙이 모두 떨어져나간 머리카락
기른 것을 모두 떠나보낸 머리카락
그래, 사랑은
저렇게 다 버려야 보이는 속살 같은 것
은 아닐까, 늙어가는 일은 그래서 상처를 들키며 가는 길
은 아닐까, 아무도 사지 않는 더덕
언젠가 닿을 마지막 밥상을 위해
남은 세월을 떨구며 앉아 있는 여인은
더는 속을 숨기지 못하는
상처난 더덕은 아닐까, 그런 것은 아닐까.
- 출처: 전남진 시집 <나는 궁금하다> 중에서 / 문학동네
- 프로필: 경북 칠곡 출생. 1999년 <문학동네> 동계 문예공모에 당선되며 작품활동
시작.
2002년 봄, 생판 모르는 시인의 시집에 홀렸던 적 있다. 그 후로 나는 그 젊은 시인의
독자가 되었고 그의 시라면 무조건 신뢰하는 고약한 버릇이 생겼다. 그와 몇 차례 메일을 주고받은 적 있다. 그때 그는 서울 생활을
정리해 고향인 경북 칠곡군 기산면 '가시막골'로 딸아이를 데리고 내려갈 계획을 세우고 있다 했는데 설마, 하는 내 생각이 무안해질
정도로 빠른 시일 안에 평생 밥 걱정 안 해도 되는 직장을 때려치우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때 나는 그가 대단한
결단력의 소유자라는 생각을 했다. 자신의 고향을 딸아이와 공유하고픈 아버지의 마음, 딸아이와 한 고향 사람으로 살고 싶다던 바람을 이루기위해
그는 전라도 화순에 내려가 흙집짓는 법을 배우기도 했다. 지금 그가 살고 있는 '가시막골' 집이 그의 첫 작품이다. 그가 말했다. 고된 노동을
마치고 돌아오면 어떤 생각도 할 겨를 없이 잠만 쏟아지더라고. 그런 그에게 지나가는 말처럼 지인들이 부탁해오곤 하더란다. 나중에 내 집도
지어줘, 라고. 그럴 때마다 순진해빠진 그, 네- 라고 대답하지 못하겠더란다. 지키지 못할 약속인 걸 뻔히 아니까. 집짓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몸소 체험해보니 허투루 대답할 수 없더란다. 그런 그가 이런 말을 했는데 기억할 수 있을까? 제 집 짓고나서 나중에 선배님 집
지어드릴게요. 훗!
요즘 읽은 시집 가운데 기억에 남는 시집은? 누가 물을라치면 전남진의
시집이라고 거리낌없이 대답했던 적 있다. 물론 그를 모를 때의 일이다. 놓치면 안될 것 같은 시편들이 내 취침을 방해했다. 그는 그런
시인이다. 내 가슴을 뛰게 했던, 나를 들뜨게 했던, 나로하여금 전남진이라는 존재를 시집 한권으로 기억하게 했던 괴력을 가진 시인이다.
그가 이런 고민을 토로한 적 있다. 등단만하면 절로 시인이 되는 줄 알았는데 친정인 문학동네를 제외하곤 시집 내기 전까지 청탁 한번 해오는 곳이
없더라고. 그게 문단이다. 그런 일로 좌절하고 시작을 포기했더라면 그라는 좋은 시인은 영영 지구상에서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세상이 알아주거나
말거나 사력을 다해 시를 써내는 게 시인의 본분이다. 그러고도 살아남을까 말까 한 게 시인이다.
그가 귀향을 한 이유가 오로지 '고향'을 얻기 위함만은 아니었을 거라고 나는 추측한다.
시집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그는 상당히 유약한 심성을 하고 있다. 시니컬하게 보여지는 부분들조차 그의 여리디여린 감성을 스스로 위장하기 위한
보호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는 어쩔 수 없이 선량하다. '가시막골'로 스스로를 유배시켰던 이유 중 시와 한판 붙고 싶었던 꿍꿍이가
상당부분 포석으로 깔려진 건 아니었을까?
시를 좋아하는 나의 벗들에게 황사 짙은 이 봄, 그를 소개한다. 숨쉬기가 한결
수월해질 것이다. 내 처음이 그러했듯 그대들도 전남진이라는 시인이 내심 궁금해지기를 고대한다. <나는 궁금하다>라는 그의
시집 제목처럼.
밋밋하게 보여질 흰색 표지에 정사각도형이 꾹 찍혀 있다. 간밤 내린 폭설
속으로 누군가 다녀간 발자국 도장처럼. 그 또한 표지 속에 들어 있는 또 하나의 빈 공간이다. 세상이 궁금하고, 시가 궁금하고, 사람이
궁금하고, 자기 자신이 그토록 궁금했던 걸까? 그의 시집을 다시 꺼낸다. 표지가 꼬질꼬질하다. 오랜동안 내 손에서 놓여지지 않았다는 증거다.
가까운 몇 사람들에게 이 시집을 선물했던 기억이 난다. 모 지역방송에 출연해 매주 시와 시평을 소개하는 선배님이 계셨는데 그분께 이
시집을 보내드렸다. 읽어보고 좋으면 소개해주십사 은근한 청탁도 행사과 함께. 물론 전남진 시인의 시는 방송을 탔다. 좋은 시는
상호 通한다.
오늘 아침 그가 나를 찾아왔다. 딸아이와 함께.
생각지도 못했던 귀한 손님이다. 하마터면 반가움에 얼싸 안을 뻔 했다. 부지런한 그
<아빠랑 시골가서 살래?>라는 산문집을 낸 모양이다. 직접 가꾼 방울토마토 밭앞에 그의 딸 다온이를 세워놓고 찍은 사진이 표지를 환히
밝힌다. 다온이가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 아빠랑 제가 밭에서 기른 건데요. 드셔보실래요? 대소쿠리에 막 익기 시작한 방울토마토가 담겨져
있다.
손세실리아님께. 오래 뵙지 못했네요. 잘 계시죠? 잡문 한두릅 엮었습니다. 전남진
드림
그의 글이 잡문이 아님을 나는 안다. 읽지 않아도 안다. 이건 지나칠 정도의 신뢰이며
편애다. 그가 있어 든든하다. 아, 다온이가 따온 방울토마토 맛있겠다. 다온이의 흙투성이 코빼기 씻겨주고 싶다. 한번도 만난 적 없는
그와 평상에 앉아 아우 한잔, 누님 한잔 권커니 잣커니 막걸리 마시러 '가시막골'에 가고 싶다.

- 전남진 산문집 <아빠랑 시골가서 살래?> /
좋은생각

- 전남진 시집 <나는 궁금하다> / 문학동네
- 2005/ 5/ 10/
손세실리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