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표작

나목을 부러워한다(낭송집)

湖月, 2016. 1. 26. 21:51





술독은 놓고 가시구려 / 안행덕



부여케 피어나는 저녁 어스름

골목의 부산함도 사라진 시간

주정뱅이 장씨네 지붕 위, 흰옷 한 벌

술에 말린 짧은 혀 바람 되어

이승을 떠나 가나보다

평생 찌든 가난, 탁탁 털고 미련 없이

동굴 같은 지하 단칸 빠져나와

생전에 그리던 높은 빌딩

훤한 지붕에 올라

마음대로 밟아보고 얼쑤얼쑤 갔을까

평생 눈치코치 없다 쥐어박던 장씨부인

눈물 콧물 훔치며

소반에 사잣밥 한 공기, 간장 한 종지,

짚신 한 켤레, 지팡이 하나를 내놓으며

입속으로 중얼거린다


이제는 가난 같은 것

하나도 무섭지 않을게요

술독은 놓고 가시구려



나목(裸木)을 부러워한다 / 안행덕



앙상한 가지에서 숨소리 들린다.

한겨울 눈보라 빈 몸으로 견디며

마른 가지 잠들지 못하게

뿌리는

엄동 내내 풀무질로 생의 끈을 잡고 흔들며

맨몸 하나로 지켜온 저 경이(驚異)


깊은 뿌리에서 끌어올린 눈물

가슴 한복판으로 흐르고

새봄의 은밀한 약속, 기다리며

가을에 떠나보낸 제 살붙이 그리워 운다


*花信(화신)으로 내리는 저 빗소리

봄비는 새순 바라기를 알리고

희망을 잃지 않는 유대인처럼

봄빛이 앉은 가지마다 팽팽하다


창밖의 빈 가지를 부러워하는 앙상한 노모

병상에서 나목이 되어가고 있다



새벽을 여는 여인 / 안행덕


 

눈꺼풀에 매달리는 잠을 달래며

천천히 앞치마를 두르는 손이 희고 여리다

어둠이 뒷걸음질치다 고요를 밟는 이른 새벽

졸음을 앞세워 새벽을 여는 사람 앞에

가로등, 졸린 눈을 끔벅거린다

희미하고 침침한 골목길

자벌레처럼 기어가는 담배꽁초

행인에 밟힌 납작 엎드린 광고지

상처 난 버려진 양심들이 떨고 있다

늘 허기지고 가난한 그녀의 하얀 손

버려진 양심들을 차곡차곡 줍는다

세상의 별이 되지 못한 사람

주체 못할 염문만 남긴 채 가버린 사람

미움도 여한도 다 싸안고 가버린 웬수

이 길거리에서 서성이면 어쩌란 말이냐

가난뿐인 앞치마에 젖은 손을 닦고

빛바랜 추억을 던지는 순간

그녀의 눈길을 와락 끄는 폐지

봄처럼 희망이 부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