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의香氣
바람행전 / 이종섶
湖月,
2010. 3. 15. 12:18
바람행전
이종섶
대나무는 바람의 뼈였다 바람의 몸집은 대나무만 했고 대나무는 바람만큼 키가 컸다 바람이 태어나는 순간 고개를 쑥쑥 내미는 죽순은 어릴 때부터 바람의 등뼈로 자랐다
먼 길을 떠날 때마다 뼈를 벗어두고 가는 바람은 한없이 부드럽거나 충분히 거칠었다 대나무도 한 칸 두 칸 마디를 키우며 바람을 향해 휘어지는 법을 배웠다
한 곳에 마음을 두지 못하는 성질 탓에 호적도 없이 살아야했던 가족들, 세상을 떠도는 바람에게 물어 간신히 찾은 산동네 3, 4번지, 굳게 닫혀있는 문을 통통 두드리면 마디마디 간직하고 있던 바람의 이력을 들을 수 있었다
수명을 다한 바람이 사라지는 계절, 척추 뼈 사이사이 빈방에서는 갓난바람들의 숨소리가 들렸고 우듬지 끝에선 파릇파릇 댓잎이 돋았다
밖으로만 떠돌던 아버지가 돌아와 막내를 데리고 갔다는 소문이 퍼지자 나이테를 전부 파내버린 바람의 가족사, 바람의 행적은 비밀에 부쳐졌다 장례식도 알리지 않았다
-문학 무크 『시에티카』 2호, 201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