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의香氣
봄을 짜는 여자 / 진해령
湖月,
2017. 2. 23. 16:25
봄을 짜는 여자 / 진해령
묵은 느티가 내려놓은 그늘에
결박된 수림 뜨개방
기억은 세상에서 제일 질긴 실
옹이 박힌 손가락에 세월을 감아
올올이 상처를 걸어 올린다
곧은 바늘에 길들여진 습관이
삶의 손톱 밑을 푹푹 찌르고
휘어진 쪽으로 몸을 돌릴 때마다
그 여자 조금씩 등이 굽는다
때로 익숙한 곳에서도 길을 잃는다
어디서 놓쳤을까 기억의 실핏줄
터진 자리마다 더께로 앉은 시간
태광모직 400번 두겹실에
허기를 조금씩 섞어 앞판을 짜는 동안
잘못 줄인 치맛단처럼 짦은 하루해가
밑천 털린 노름꾼 얼굴로 사라지고
옹벽에 수직으로 갇혔던 바람이
가슴 쪽으로 한 걸음 다가선다
스위치 올리면 뿔뿔이 달아나는 어두움
삼파장 밝은 빛줄기에 침침한 시간이 씻겨나간다
세상 어두어지면 추억의 내부 더욱 밝아지고
2월 말의 가랑눈이 하루살이로 잉잉거린다
등 시린 사람들 위해 봄을 데려오는 여자
내일쯤 호랑 배추나비 서너 마리
누군가의 시린 생으로 배달되리라
시집 <너무 과분하고 너무 때늦은> 문학의전당.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