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일본 문예지에 소개된 시
자작나무 내 인생 / 정끝별(鄭クッピョル)
속 깊은 기침을 오래 하더니
무엇이 터졌을까
명치끝에 누르스름한 멍이 배어 나왔다
길가에 벌(罰)처럼 선 자작나무
저 속에서는 무엇이 터졌기에
저리 흰빛이 배어 나오는 걸까
잎과 꽃 세상 모든 색들 다 버리고
해 달 별 세상 모든 빛들 제 속에 묻어놓고
뼈만 속은 서릿몸
신경 줄까지 드러낸 헝큰 마음
언 땅에 비켜 깔리는 그림자 소슬히 세워가며
제 멍을 완성해 가는 겨울 자작나무
숯덩이가 된 폐가(肺家) 하나 품고 있다
까치 한 마리 오래오래 맴돌고 있다
푸른수염고래 / 정끝별
밤이 바다를 거슬러 높아질 때
젖은 바다 날개 소리를 내며
천천히 수면 위로 부상하는 긴수염고래
백 살 난 지느러미로 모래를 휘저으며
불길 같은 꼬리로 바위를 후려치며
불길 같은 꼬리로 바위를 후려치며
긴 수염을 성난 바다의 목구멍에 밀어 넣어
바다의 깊은 울음을 건져 올렸던가
바다의 담벼락이 하늘 높이 일어서
둥근 달을 베었던가 베어진 달이
긴수염고래의 횡격막에 박혔던가
긴 휘파람 소리가 폭죽처럼 치솟았던가
긴수염고래의 푸른 핏줄기가
떩로 있는 떡갈나무 너머 새벽별로 부서졌던가
낮아지는 수평선을 가르며 꼬리를 돌렸던가
밤이 바다를 거슬러 높아질 때
바다가 백 년을 품고 있던 긴수염고래를 내보냈다
왜 빠르게 삼켜버렸는지는 비밀이다
썰물이 진다 이제 또 한 꺼풀을 벗는 바다여
청춘의 조난자로 하여금 울게 하라
삼켜버렸기에 한없이 푸른 것들을
정거장에 걸린 정육점 / 정끝별
사랑에 걸린 육체는
한 근 두 근 살을 내주고
갈고리에 뼈만 남아 전기톱에 잘려
어느 집 냄비의 잡뼈로 덜덜 고아지고 나서야
비로소 사랑에 손을 턴다
걸린 제 살과 뼈를 먹어줄 포식자를
깜빡깜빡 기다리는
사랑에 걸린 사람들
정거장 모퉁이에 걸린 붉은 불빛
세월에 걸린 살과 뼈 마디마디에
고통으로 담아놓고 기다리는
당신의 밥, 나
죽을 때까지 배가 고플까요, 당신?
정끝별(鄭クッピョル)
1964년 나주 출생. 이화여자대학교 국문과와 동대학원 석,박사 졸업.
1988년 문학사상신인상 수상으로 등단. 199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평론 당선.
시집으로 자작나무 내 인생흰 책삼천갑자 복사빛등이 있다.
시론 평론집으로 패러디 시학천 개의 혀를 가진 시의 언어등이 있고, 산문집 행복시가 말을 걸어요등이 있다.
현재 명지대학교 국어국문과 교수.
붉은 거미 / 손택수
할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일년 전부터 붉은 거미가 보인다고 하였다. 붉은 거미가 천장에서 내려와 큼큼한 냄새가 나는 방안을 흰 머리카락 같은 거미줄로 가득 채워놓고 있다 하였다. 아무도 그걸 치워주지 않는다며 까까머리 어린 손주의 손목을 잡고 거미줄에 걸린 나비
날개처럼 파르르 떨리는 숨을 몰아쉬곤 하였다. 그때 삭정이 손가락이 가르킨 곳, 눈꼽처럼 먼지가 끼어 있던 창문 너머론 짱짱한 가을 햇살이 하얗게 쏟아져 내리고 있을 뿐이었는데
이십 년도 더 지나 아픈 몸으로 시골집에 내려와서 당신이 앓아 누웠던 자리에 잠을 청하다보니 보인다. 여전히 눈곱이 끼어 있는 창문 너머로 사방에 거미줄을 치고 있는 태양. 햇빛에 돌돌 말려 몸속의 수액이 빨려 올라가는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는, 듣고 있어야 하는,
붉은 거미의 줄에 걸린 생. 누구도 벗어날 수 없고 아무도 대신 걷어줄 수 없다면 나는 그때 창문에 때묻은 커튼이라도 한 장 달았어야 했다. 허공에 손을 내젓는 시늉이라도 한두 번 해주었어야 했다.
放心 / 손택수
한낮 대청마루에 누워 앞뒤 문을 열어놓고 있다가, 앞
뒤 문으로 나락드락 불어오는 바람에 겨드랑 땀을 식히
고 있다가,
스윽, 제비 한 마리가,
집을 관통했다
그 하얀 아랫배,
내 낯바닥에
닿을 듯, 말 듯,
한순간에,
스쳐지나가버렸다
집이 잠시 어안이 벙벙
그야말로 무방비로
앞뒤로 뻥
뚫려버린 순간,
제비 아랫배처럼 하얗고 서늘한 바람이 사립문을 빠져
나가는 게 보였다 내 몸의 숨구멍이란 숨구멍을 모두 확
열어젖히고
길바닥에 손바닥을 부딪쳐 / 손택수
비탈길이었다
깔판에 바퀴를 단 사내가
깔판에 엎드려 미끄러져
내려오고 있었다
허리 아래 하반신이 뭉텅
잘려나가고 없는 사내,
굴러내리는 바퀴의 속도를 어떻게든 줄여보려고
양 손바닥으로 연신 땅을 짚어댔다
길바닥에 손바닥을 부딪쳐
짝 짝 짝 박수를 치며
브레이크를 걸어댔다
모두들 위태롭게 길을 비켜주었지만
사내는 놀랍게도 태연한 얼굴
바닥에 가슴을 숙이고 살았으므로
더 이상 떨어질 바닥이 없으므로
바닥에 처박혀 나뒹군다 하더라도
무심히 털고 일어설 것만 같았다
간신히 평지에 다다른 사내가 이내
화끈거리는 손바닥으로
바퀴를 굴리기 시작했다
가속 페달로 바뀐 손바닥이
길바닥을 짚으며 평평한
비탈길을 굴러가기 시작했다
손택수(孫宅洙)
1970년 전남 담양 출생. 부산에서 성장. 경남대학교 국문학과 및 부산대학교 대학원 졸업.
199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언덕 위의 붉은 벽돌집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 시작.
시집으로 호랑이 발자국목련 전차가 있고, 산문집으로 바다를 품은 책 자산어보 가 있다.
수상으로 <신동엽 창작상>, <이수문학상>, <이육사 문학상>신인상, <현대시 동인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