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표작

시가람 낭송집. (75~82)

湖月, 2011. 8. 16. 10:41

 

 

  75회        수선화 / 안행덕



                        언제나 말 없으시다

                        퍼런 피멍 보일까

                        앞가슴 단정히 여미신다

                        바람 잘 날 없는

                        층층시하의 고단한 세월

                        깊은 한숨은

                        잔잔한 수면위로                        

                        노랗게 풀어서 조용히 흘려보내시고

                        수줍은 미소로 그렇게 피어나셨다



                        소담스런 꽃망울 곱게 피워놓고도

                        언제나 다소곳이 기척 없으시다

                        밤새 돌아오지 않는 지아비는

                        하늘이라 정해두시고

                        찬바람 수선화만 가여워하시던 어머니


 

                      

 

                        바람 따라가시려나                    

                        창호지에 귀 기울이신다

                        여유를 찾으시려는 듯

                        은빛 날개 나비처럼 접으시며

                        인고의 쓴 잔을 다 비우시고

                        툭, 떨어지신다

 

 

76회  초례청 [醮禮廳] / 안행덕

 

                                        


원삼 족두리

홍의 대례복을 보는 내 눈이 시리다

 

내 살점 떼어내어 이슬처럼 고이다가

아직 여물지도 않은 것을

바람 앞에 내 놓았다


무언가 먹어야 한다고

오물거리던 조그만 입

낯선 세상이 부끄러운 듯 꼭 감은 두 눈

너무 작아 밥풀 같은 발가락

정말 숨을 쉴 수 있을까 걱정했던 작은 콧구멍

네가 태어나던 날 너무 신기해

보고 또 보고

살며시 작은 손을 잡아본 내 손

따뜻함이 전류처럼 흘렀었지


어느덧 자라

어미 품을 매미 허물처럼 벗어놓고

제 짝을 맞이하는 어엿한 새 각시가 되었구나.

연지곤지 바르고

족두리가 파르르 떠는 너를 보는데

한쪽 가슴은 기쁨과 환희가 넘치는데

한쪽 가슴은 왜 이리 허전하고 시린지 


너도 네 새끼 낳아 키워봐라

그때 에미 속을 알리라고 하시던

그리운 목소리가 귓전에서 이명처럼 맴돈다 

 

 

 

   77회 땅 끝에서 / 안행덕


 

끝이라는 것이

가슴 저리게 하는 말이구나.

저 멀리 바다 건너 작은 섬들이

나의 눈물처럼 흩어져

애태우며 날 바라만 보고

밀려왔다 밀려가는 물거품

그저 내 발끝만 스칠 뿐 말이 없구나

설움에 겨운 바다의 서사시가

망망한 수평선에 은빛 파도로 빛나고

갈매기 날개에 노을빛은

수의처럼 서럽구나

땅의 끝이라는 토말(土末)탑 아래

긴 그림자 끌고 선 여인

젖은 가슴

소리 없이 무너지는구나

 

 


78회   촌수 없는 남자 / 안행덕


 

여보 밥 여보 물

눈 뜨면 시작하는 이 남자

피도 살도 섞이지 않은 촌수도 없는 그에게

영혼을 송두리째 저당 잡힌 줄도 모르고

장미는 향기만 있는 줄 알았지

하늘같이 받들라 이르시며

눈물 글썽이시던 친정어머니

어쩌자고 이제야

향기 속에 숨은 가시가 보이는지


세상에서 가장 가깝고도 먼 사이

티격태격 된다 안 된다 맞다 틀리다

칼로 물 베기라 했나요

맞아요, 물를 닮았나 봐요

벤 자리 또 베어도

금방 아무는 상처는 물 같아요


흰 서리 덮이는 세월이 야속해도

작은 봉당에서는 된장찌개 향기롭고

뒤꼍에서 여보 소리가 담을 넘는다

 

 

79회 江(강) / 안행덕



강의 나이를 아시나요.

긴 세월 쉼 없이 깎이고도 참

편안히 흐릅디다그려

모난 돌에 할퀴고 벼랑에 부딪혀

퍼렇게 멍이 들어도

그 아픔 참을 수 없어

몸을 뒤틀며

그래도 쉼 없이 가야 하는 길

잊혀갈 세월 서러워

잘게 부서지는 푸른 신음이 아프다

 

오늘도 햇볕에 그을려 눈부시다

글썽이는 눈망울

울먹임이 

물비늘로 반짝일 때

세월의 아픔을 안고도 처연히 흐르는 강

그, 

속 깊은 가슴이 되고 싶다.

눈부시도록 아름답게 비워 내고 싶다

흐르는 세월처럼 처연해도

아무도 몰라주는 나이

속 깊은 저 강물의 나이를 아시나요.

 

 


80회 가시고기  / 안행덕   


지팡이에 겨우 의지한 노구

부챗살처럼 둥글게 휘어진 허리

고달픈 낙타 등을 닮아서

사막처럼 막막한 세상 살아오신 아버지

천만 가지 시름 다 짊어지시고도

자식들 앞에서는 언제나

괜찮다 괜찮다 허풍만 치시던 아버지

새끼들의 먹이가 된 가시고기처럼

당신의 뼈와 살을 다 내어주시고도

마음에 맺힌 한  풀지 못해

넋두리처럼 슬픈 연가 부르시다가

자식의 마음에 집 한 채 지어 놓으시고

바람 따라가시더니 

설움바쳐 지켜온 날들 못잊어 

밤마다 그리운 꿈처럼

먼 하늘에서 별이 되시어 빛나시나요

 

 

                 81회 재가 되기 전에 /  湖月 안행덕

                                   


매캐한 연기는

몸통 속의 절망을 알리는 신호인가

활활 타는 불꽃에 던져진 생나무 한 토막

뜨거운 열기에

몸속의 수분을 모두 내 품어 보지만

몇 분도 채 견디지 못하고 불이 붙는다


잎새들의 함성처럼 튀는 저 불꽃들

타닥거릴 뿐

별빛을 닮은 불꽃 하늘 높이 오르지 못하고

허공처럼 텅 빈 내 가슴에 박힌다

 

저토록 뜨겁게 달구어진

생목처럼,

안달 내고 바동대는 나.

기어이 나도 한번 소망하나

당겨 보어야 하지 않겠나


내 가슴에 용암처럼 들끓는 언어들

하나씩 꽃등처럼 내어 걸고 싶다

가슴에 박힌 불꽃 재가 되기 전에

 

 

 

82회 나만 못 가네       안행덕

 

 

 

이념의 벽처럼 아득히 높은

통일 전망대

계단이 나풀나풀 내려와

내 발아래 엎드려 있는데

철조망 건너 저쪽에

동해를 휘돌아 달리는 철로선

원산 가는 국도를 따라

바람은 잘도 가는데

나만 못 가네

삼팔선 가까이 푸른 동해는

철썩철썩 노래 부르며

얼싸안고 돌며 자유롭네

철조망을 넘나드는 작은 산새도 바다 새도

정답게 서로 만나서

지지 재재 소식 주고받는데

나만 못 가네

나도 시린 아픔 동해에 풀어놓고

하얀 웃음 날리며

임 만나러 갈라네

퍼렇게 멍든 속내는 감추고

그냥 꽃처럼 웃어 줄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