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결의 미학
컴퓨터 글쓰기가 보편화되면서 시에 산문적 진술이 넘치고,
요설과 객기가 난무한다. 많은 시들이 의도적으로 여백을 없애고,
운율을 죽이며, 절제의 미덕을 대수롭잖게 팽개친다. 그런 터수에
오염된 욕망과 훼손된 진실의 복원을 운위하며 공허한 말잔치,
뜻모를 유희를 즐긴다. 그러나 죽은 내재율의 시가 자초하는
파행적 귀결에 대한 우려 또한 적지 않다. 자유시의 숨길 수 없는 부담은
정작 그 무한량의 자유에 있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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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의 형식은 정형률이기 전에 '인간율'이다. 때문에 그것은
부리는 이의 성정에 따라 얼마든지 개성적인 형식을 재창조할 수 있다.
긴장과 탄력, 절제와 함축을 바탕으로 한 완결의 미학.
시조 3장의 형식미학은 이 땅의 문학적 진실과 오랜 역사의 순환 속에
녹아든 정서적 효용 가치를 담보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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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가 살이라면 형식은 뼈다. 살을 추려낸 앙상한 늑골 사이로
진눈깨비 치는 원경이 보인다. 열린 시조, 살아 있는 시를 찾아 헤매는
길 없는 길. 혹은 길 밖의 길. 충일하지 못할수록 치장이 필요한 법이다.
동양화의 여백이 왜 소중한가. 그 속에서 그림에 없는 물소리 들리고,
꽃의 향기가 번져나오기 때문이다. 시조 3장의 고적한 행간을
온전히 다스리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내공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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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내 정신의 불씨요 재다. 그러므로 나의 시쓰기는 사윌 줄 알면서도
연신 불씨를 지피고, 또 그 불씨를 쑤석거려 재를 남기는 일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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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칼'과 '물'과 '붓'을 늘 손닿는 곳에 두고 사는 사람이다.
여기서 '칼'은 시의 대사회적 기능을 말한다. 이른바 시대정신과 저항의지다.
칼은 언제나 자아와 세계의 모순을 겨냥한다. 냉철한 비판의식만이
흔연히 그 자루를 잡을 수 있다. '물'은 화해와 사랑의 표상이다.
칼날에 묻은 피를 혀끝으로 씻고, 만나면 스스럼없이 몸을 섞는 물.
그런 흐름의 순리로 자아와 세계의 상처를 아우르며, 시 형식 자체의
자연스런 운용을 꾀한다. '붓'은 창조와 자유의지를 대변한다.
곧바로 섰을 때 붓은 붓으로서 온전히 구실하는 것. 굽힐 줄 모르는
직립의 꿈은 창조의 열망이자 자유의지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칼'과 '물'이 길항하는 가운데 화해의 '물'이 쉬임없이 흐르는-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시의 표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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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한 줄을 위해 이전의 아홉 줄을 흔쾌히 버릴 수 있을 때,
비로소 진정한 한 사람의 시인으로 서리라. 모름지기
시인은 시로써 말하고, 시로써 만나며, 시로써 공유의 삶을 꿈꾸는 사람이다.
출처 : 박기섭 시인의 하늘에 밑줄이나 긋고 (만인사刊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