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의香氣

잘가라,환幻 / 이규리

湖月, 2015. 7. 7. 20:46

 

잘가라, 환(幻) / 이규리


먹어도 배부르지 않고

굶어도 배고프지 않은 그런 때가 있다

뭔가 획, 지나가버린 때

주방 구석에 앉아 상추쌈 먹으며 울었다

쑥갓 두어 잎 얹어 먹으며 울었다

푸성귀처럼 퍼렇게 살아 있으리라 믿지는 앉았지만

지나갔다,

막막해서 입 미어지도록 상추쌈 쑤셔 넣었다

혀를 깨물었다 혀가 씹혔다

치명적인 오류가 생겼을 때

아무 키나 누르면 회복되기도 하지만

그나마 남은 것 다 지워질까 봐

노심초사 상추쌈만 꾸역꾸역 넣는다

쌈장에 찰지게 버무려진

환(幻)이라는 것,

마늘 환(幻), 양파 환(幻), 참깨 환(幻)

꼭꼭 씹어 먹는다

내가 먹은 게 너였나

너가 먹은 건 나였나

가부좌 틀고 앉아 들었다 놨다 한 너,

잘가라, 환(幻)

속치마 레이스 같은 환(幻)을 걷어내면 문득

실핏줄 아른아른 비치는 늙음이 다가와 있을 거다

여기서부터 가파르다

단물 빠진 거친 밥상 위

이제부터 제대로 맛을 아는 때라고

깊은 맛은 씹은 뒤에 안다고

넌지시 또렷하게 말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