湖月, 2016. 6. 29. 17:33


격자창

 

격자 창살에 매달린 열이레 달빛

침침한 방안을 슬쩍 염탐하는데

심심하던 창살은

달빛을 마름질해 조각을 내고

조각난 추억을 퍼즐 놀이하듯

설익은 그리움 하나둘 맞춰나간다

 

격자 창살에 잘려버린 먼 전설 같은

너와 나의 인연

오늘은 어제를 잊고

내일은 오늘을 잊어버려라

망각이라는 놈이 꼬드겨도

희미한 추억 창문을 넘어들어오는데

무정한 격자 창살에

비명도 없이 잘리고 있네


조개무덤

 

주인을 잃어버린 빈집

누가 이렇게 무덤처럼 쌓아 놓았나

산처럼 모여 있어도 외로운가

가슴 열어 놓고 먼 산 바라기를 하네

 

세상에

뼈를 깎아 세운 아름다운 집

이렇게 고운 집에는 누가 살았을까

어느 누가 보쌈을 해갔는지 흔적도 없네

 

대문도 없는 빈집에 죽은 조개를 찾아온

바다를 건너온 바람이 조문하고

애도 곡 같은 파도 소리 따라

물새들 울음은 곡哭소리처럼 서럽네

애장터에서 우는 새끼 잃은 어미 같네

 

바람둥이 파도는 쉬지 않고

주인 없는 빈집을 슬쩍슬쩍

염탐하듯 들여다보네

 

꽃이 좋아라

 

꽃 진다고 슬퍼하지 마라 

그 모습 그대로 다시 올 테니 

약속하고 떠나는 그 모습 아름다워라

 

말없이 떠난 꽃 같은 그대

우연히든 필연이든 다시 만나리  

약속을 지킬 줄 아는 꽃이 좋아라

 

무시로 흘러가는 세월에도

피고지고 다시 피는 사랑아

속절없이 기다려도 좋아라

 

추사와 참솔

(歲寒圖를 보고)

 

초막 위 달빛 따라 하얗게 내린 눈

임인 듯 적소를 보듬어서 품어 안고

에인 듯 살얼음 속내 슬그머니 엿본다   


추사의 옛 흔적 묵향으로 지켜보고

가만히 먹먹한 속내 필획으로 풀어서

단정히 굵고 가늘게 푸른가지 살핀다  


헛헛한 눈시울로 옛 정취 그리는데

오두막 문틈으로 보이는 청초한 솔

이것이 추사체인가 물어보듯 흔들린다  


한겨울 적거지(謫居址)에 우는 저 송백

선비의 곧은 절개, 푸른 지조 같아라

바람을 탓하지 말자 세작처럼 서러워도



징검다리

 

 

멈출 수 없는 세월에 뒤질세라

쉬지 않고 흐르는 물도

가끔은 머뭇거린다.

물 위에 문신처럼 새겨진 돌을 만나면

저도 모르게 순해지는데

이쪽과 저쪽을 이어주는 징검돌의

부르튼 발 때문이다

 

누군가의 마른 발이 젖지 않고

징검징검 밟고 가라고

제 몸 통째로 제물로 바치고 침묵하며

흐르는 시냇물에 맨발을 숨긴 돌

 

물 위의 표정은 태연한척하지만

물살에 헌(傷處) 발은 상처투성이다

통증으로 절룩거리면서도

제 소임을 다하려고 ​

나란히 서 있는 친구 손을 붙들고

물살에 떠내려가지 않으려 부르르 떤다

 

달 항아리

(이조 백자)

 

 

두리둥실 떠오르는 달처럼 환하네

이녁의 곁에 서면 그 자태 너그러워

뉘라도 순수해져서 마음을 비우지

 

순백의 우윳빛 부신 듯 아련해도

토태土胎에 숨겨진 단단한 심기는

언제나 휘영청 밝은 달 같은 모습이라

 

오백 년을 살아도 늙지도 않았고

탱탱한 하얀 피부 아직도 윤나네

그 자태 눈부시게도 달처럼 고아라 



화전 풍경(火田 風景)


​​

병풍처럼 둘러선 태백산맥 끝자락

​천둥과 비바람 백 년을 흔들어도

하얀 구름모자 삐딱하게 쓰고

낡은 집 한 채

핼쑥한 낯빛으로 누구를 기다린다 ​

빛바랜 사진첩인 양 

 

촘촘한 너와(瓦) (木) 사이마다  

비릿한 생선 비늘 같은 ​너와 지붕

​푸른 이끼로 세월을 새겨 넣고

허기진 가난과 고난의 이력을

역사처럼 펼쳐놓은 회색빛 풍경

풀잎 스쳐 간 벌레들 울음소리

물 한 방울 흘러간 흔적까지 선명하다 ​ 

짓궂은 바람의 어릿광대에, 반쯤 열린 문짝

추억처럼 묶어둔 역사 한 페이지


시큰거리고 덜컹거리는 무릎으로 ​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듯 기우뚱 엉거주춤 

​너와집 한 채 쓰러질 듯 서있다 


주인이 드나들던 문틈으로

보랏빛 엉겅퀴꽃 한 발 들여 민다 



바람이 전하는 말


바람 부는 날 귀 기울여 봐요

봄이 오는 소리 들려요

저마다 제 빛깔 드러낸

봄이 오는 강변 길

사유를 전하는 바람 만나면

세파에 찌든 상처 날아가고

도도히 흐르는 강물처럼 여유로워라

 

강 너울에 드러난 모래톱에

외다리로 새 한 마리 그림처럼 서 있고

아슴아슴 하늘 내려와 가슴 시린 날

내 마음 헹구는 바람 불어와

숲과 강과 들꽃 이야기 들려주는데

문득 선경에 들어선 듯 황홀해

바람이 전하는 말 다 받아 적지 못했네

 

바람이 전하는 말 2

 

나를 잊었나요

바람 부는 날 귀 기울여 봐요

괴로워도 슬퍼도

착한 여자 되겠다고 울지도 못한 여자

어느 가을날

낙엽 따라 내(川)를 건너 숲으로 간

맹한 여자의 울음소리 바람이 되고

이슬 젖는 새벽이면 하얀 앞치마처럼

무덤가에 구절초로 피어난 여자

아직도 그대 그리워

바람 되어 그대 곁에 맴을 도는데

바람이 전하는 말 들리시나요

벌써 나를 잊었나요


 

바람의 그림자



천인賤人을 닮아서 서럽다고 운다.

제 그림자를 찾아서

얼마나 많은 길을 헤매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생의 언약도 없는 바람처럼

차창 밖 풍경처럼 지나가는 삶

눈 내리는 겨울밤 갈길 잃는 빈 마음

어디로 가야 하나

사는 게 고단하지 않은 사람 어디 있으랴

같이 갈 이 아무도 없는 고행길

빛없는 어두운 밤에 그림자 잃은 영혼 되어

어디로 가야 하나

길 잃는 바람 같은 나, 오늘도

제 그림자 찾아 황량한 벌판에서

회오리를 꿈꾸는 바람이어라



외롭지 않은 등대

 

지친 바다를 다독이던 석양

졸음을 참지 못하고 파도 뒤로 숨는다

때를 기다리던 어둠은

재빨리 바다를 잠재우려 하지만

불면의 바다는 뒤척이며 몸부림치고

밤바다에 빗줄기 뛰어내리면

망망대해서 방향을 잃고

바람을 따라갈까

구름을 따라갈까

배 한 척 어둠을 가르며

난해한 표정으로 울먹일 때

외로운 등대가

깜빡이며 신호를 보낸다

여기에요 여기

옷깃 여미고 기다린 그리움

희망의 불 밝히며

새색시 그리운 임 마중하듯

등불 밝히고 다소곳이 서 있네

 

나무는 봄을 기다린다



땅심이 부드러워질 기미를 알고

입춘이 오기도 전에

뿌리부터 우듬지까지 봄맞이 하자며

나무는 벌써 잔사설을 늘어놓고

햇살과 바람에게 청탁을 한다


온몸을 적시는 찬비 송골송골 맺혀도 

새봄에 태어날 수만 마리 새끼 생각에

자글자글 눈웃음이다

 

가지마다 새순

먼저 나가겠다고 요란하다

작은 주둥이를 벌리고

봄비를 맛있게 받아먹는다.

 

뾰족한 주둥이 재재거릴 때마다 

파릇파릇 피어나는 꿈

그리움에 들뜬 나무가 푸르다



그림자도 그리운 날  


 

세상 모든 게 시들하다가도

가끔은 울컥 그리운 게 있다

아무도 찾지 않는 고목 아래

달빛과 함께 찾아온 그대

  

행여 그대 오려나

동구밖에 시선을 두고 까치발 올리는데

그리운 옛이야기처럼 내 곁에 선 그대

그림자 되어 말이 없네

  

잎 떨군 외로운 가지마다

먼 길 떠나려는 임 인 냥,

애처로운 눈길로 보네

쓸쓸한 겨울의 정자나무처럼

제 그림자와 밤이 다 새도록 사랑을 하네



복천 고분에서

 

조상들 무덤 열어놓고 보라 하네

복천동 고분

이 동네 물맛이 얼마나 좋으면

복천福泉동이라 했을까

물맛부터 보고 싶었네

그 옛날 옛적 살림살이 살펴보는데

토기로 만든 굽다리접시 목항아리 토제등잔

갑옷과 철제투구 함께 묻힌 부장물 사이

깊고도 먼 세월 인정이 흐르는데

전생에 내가 쓰던 유물같이 정답고 살가운 풍경

평화의 비둘기 깃털처럼 떨어진 넋이

해인海印에 들어 조용하다

 

텅 빈 무덤이 아니네

아주 오래전 가야시대 사람들

숱한 역경에도 불굴의 투혼과 사랑이 있었네

깊은 계곡에 달이 질 때면

젊은 영혼 그 밤이 다 가도록 울기도 했으리​

역사의 수레바퀴에 걸린 엄청난 파일을 담은 고분

아무리 돌려도 끝날 기미는 없네​

해 질 녘 호숫가에서

   

 

내 마음에 드리운 안개 같은 그리움 

물결도 잔잔한 호수에 비친 풍경처럼  

물 위에 비친 내 그림자

눈물같이 서럽네

   

나는 지금 울컥 저물고 있다는 생각  

가버린 계절과 청춘을 그리워함인가 

미래가 두려운 건가

아직 나는 모르네

   

다만, 물에 비친 황혼의 아름다움에  

피고 지는 생각 그냥 눈물이 나네 

고요 속 하늘

조용히 내려와 지켜보는 이 한때


 

생불을 만나다


화원 한구석

두 손 두 발 묶인 소나무 분재盆栽  

작은 화분에 가부좌 틀고 앉아있다

등신불처럼 머리에 백열등, 향로처럼 이고

온몸에 거룩한 경전을 새기고 있다


사지를 철사로 묶인 채 무아에 든 생불이다

두 눈 딱 감고 합장하며 화르르 불사르다

소신공양하듯

잎마다 기를 사르며 향을 피운다

억겁의 죄를 사죄하듯

어쩌다 꿈에 본 부처를 만난 듯

새순이 핀다

소나무 입술에 작은 미소 보인다


 

묵향墨香에 취해서


 

하얀 화선지에 살포시 내려앉는

먹물 한 방울

처음부터 고단한

제 생을 말없이 그려낸다

 

천이백도 고열도 견뎌낸

절절한 송백의 기백

제 짝인 벼루를 만나 반가운 맘에

까맣게 탄 제 속을

물 한 방울에 풀어 자백하듯

묵향의 사연을 술술 풀어낸다

 

단단한 제 몸을 풀어

시름을 달래듯 국궁 사배 엎드려

한 획마다 간절한 사연을 담아

고고하게 좌정하며 젖은 마음 내려놓는다 

 

죽방멸치

 

 

지족 항에 봄이 익어갈 지음

어부는 설렌다

부채꼴 죽방림에 밀려올 봄 손님

푸른 바다의 속살처럼

하얀 두루마리 풀리듯

인조 한 필 풀어 길을 내시고

난류를 타고 온다. 유속 따라 온다

춤추듯 흔들리며 들어온 손님

사뿐히 뜰채로 모시고

멸막을 다녀오신 손님

먼 길 오시느라 고단한지

채반에 누웠다

상처하나 없이 빛나는 자태 

은백색 몸체가 도도하다 

 

 

그저 무심했네

 

내 마음에 옹달샘 하나 있는 줄 모르고

한평생 살았네

그 샘에서 생명수 흘러넘쳐도

귀한 줄 모르고 무심했네

봄이면 연초록 이파리 초록으로 물들이고

여름이면 잎마다 무성하게 키워내며

가을이면 풍성한 수확을 약속하는 생명수

내 안에 있는 걸

이순을 넘어서 겨우 알았네 

부질없는 욕심으로

성에 낀 유리벽에 갇혀 살았네

성에처럼 얼어붙은 마음 닦아내고

환하게 웃는 마음으로 풋나무에 물 주듯

모든 걸 사랑하며 살아야지

햇빛을 그리워하는 나뭇가지처럼

사랑만 하며 살아야지



단비가 내리네

  

바짝 마른 입술에 생명수 흘려주듯이

불볕 아래 시들은 풀잎을 살려내는 소리

사락사락 자비로운 발걸음으로 달려와

절절 끓는 아이 이마를 짚어주듯

부드러운 엄마 손으로 대지를 어루만지네

  

그리움에 속이 타는 능소화 살리려

단비가 내리네

 

자락 자락 자비의 소리

갈라진 논배미에서

꼬부라진 오이밭에서

수런수런 피돌기가 시작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