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의香氣

제8회 지적문예공모전 시부문 수상작

湖月, 2009. 2. 26. 12:58
제8회 지적문예공모전 시 부문 수상작

-시 부문 금상 수상작이 대상을 차지하게 되어 금상은 없습니다.

 


[대상]

호미 휜 허리에서 영글어가는 들녘의 꿈

김연희



호미를 보면

어머니 휜 허리가 떠오른다.

살아온 세월

척박한 비탈밭 고랑마다 돋아난

잡초들 뿌리째 뽑아야 튼실한 역사 싹튼다고 했던가?


호미 등허리를 만질 때면

지도에도 나오지 않던 마을들의 근대사가 보인다.

마을과 마을 하나로 이어주던 길, 구부러진 역사의 이랑마다

잡초처럼 뒤덮인 외침(外侵)을

야위고 섬세한 손길로 뽑아낸

어머니 무뎌진 호밋날 너머

고개 숙인 알곡들이 아리랑 가락 담아

전라도에서 경상도로, 강원도에서 서울 충청으로

출렁대는 꿈 영글어가는 들녘을 본다.


노고지리 서툰 날갯짓이

보리밭 스멀대는 아지랑이 속 떼 고함으로 봄을 피우는 꿈도,

산비탈 콩밭 고랑마다

산 꿩이 제 이름 부르며 구수한 전설들 부화(孵化)하는 노래도,

맨드라미 정갈한 희망이

아직 바람의 발길 닿지 않은 가을 길섶에서

선홍빛으로 익어가는 까닭도,


이 땅의 아픔 다독여온 어머니의 호밋날로

흙속 갇힌 슬픈 四季를 일구어

산과 마을, 강과 들녘 사이 아름다운 길 트이게 하는 날

산기슭마다 새겨놓은 새 역사의 떡잎들 지천으로 피어난다.


들녘마다 잘 여문 이 땅의 가을 경전(經典) 읽고 있으면

끝이 뭉개진 호밋날 너머

등허리 휜 어머니 육자배기 구성진 들녘의 꿈으로 영글어간다.




[은상]

자벌레

이종섶



머리에서 발끝까지 눈금을 가지고 있는 벌레

나무 위에 올라가 가지와 잎사귀를 재면

가지마다 새순이 돋고 나뭇잎마다 잎맥이 생긴다

가지와 잎의 물관에 맑은 수액이 흐른다

하늘을 향해 곳곳으로 뻗어나간 가지의 길과

길을 따라 자리 잡은 초록잎사귀의 마을에

낮에는 햇빛이 밤에는 달빛과 별빛이 머물다 가고

고단한 그림자와 가여운 이슬도 쉬었다 간다

대대로 물려받은 숲을 지키고 가꾸기 위해

눈금이 새겨진 깃대의 마음이 되고

깃대를 보며 측량하는 기사의 눈이 되어

좁은 길과 구부러진 길을 자세하게 살피다

원석처럼 숨어있는 도로를 찾아내면

반듯하게 완성되어 제 모습 드러날 때까지

바람이 앞서가고 구름이 따라가며

도란도란 옹기종기 이야기꽃을 피우는 새길

한 자 두 자 깊은 눈으로 가늠하며

온 몸으로 기어간 곳마다 정성과 땀이 묻어나고

힘들게 지나간 곳마다 길과 마을이 탄생한다

작은 키로 재어준 꽃과 수풀과 나무들이

반듯하게 잘 자라 씨앗과 열매를 맺을 때쯤

이마에 가득한 솜털은 더욱 훈훈해지고

모든 뿌리에도 웃음이 솟아 우듬지까지 퍼진다

숲속의 식물마다 간직하고 있는 마디에서

자벌레 발자국 소리가 자박자박 들리는 밤

이제야 포근한 집으로 돌아가는 것일까

눈금을 벗어 옷장에 걸어두고

고운 단잠을 자는 자벌레 한 마리




[은상]

위대한 땅

김선균



우린 땅을 딛고 살아간다.

땅 위를 가로지르는

저 순수한 하얀 선

그 선을 돋움삼아

터전이 일구어진다.

삶이 생동한다.


저기 널부러져 버려진 땅아.

널 계획하고

널 다시보고

널 재단한다.

너의 그 이마 위에 초록의 새싹을 심어본다.

그 새싹이 생명의 발버둥으로 메아리칠 때

재단되어 가꾸어진 너는 생명의 근원이다.


아! 대지야, 땅아, 삶아.

이제 곧 너의 모든 그 품안에

우리의 모든 그네들은

꾸움틀 대는 그 약동하는 아우성에

크나큰 별의 고향으로 이제 다시 시작할 것이다.


재단된 대지에 그림을 그려

다시 너의 그 위대함을 인류에 알리리.




[동상]

경계를 긋다

임정윤



칡넝쿨과 환삼덩굴이 집어삼킨 땅

밭과 산기슭의 경계가 무너져 있었다.

오래 돌보지 않아 버려진 할아버지의 땅

바람에 개망초 엉겅퀴만 무성했다.


ㅇㅇ군 서면 ㅇㅇ리 336번지

산기슭 아래 5,359평방미터의 밭

가을시제 때면,

옛난짓골 고조할아버지의 벌초며,

제사상차림의 위토가 되기도 했던

그 땅을, 지금 아버지가

십여 년 무너진 세월을 바로 세우고 있다.

넝쿨풀과 잡초들이 대딛기 어려운 배경 속에서도

읍내에서 온 측량사 두 사람이

바지런히 밭과 산기슭의 경계를 긋고 있다.


그들 이마엔 땀방울이 송송 돋아나고

근육질의 앞가슴도 벌써 후줄근히 젖었다.

밭둑 느티나무 그늘에 앉아서

넉넉한 고향인심에 젖어드는 아버지

아느새 당신 눈가가 벌겋게 젖어있다.


살기 위해 도회지로 떠나야만 했던 아버지

당신 얼굴을 가득 채운 나이테처럼

많은 세월이 흘러갔지만 여전히 남아있는 건

담장이 없던 마을의 애틋한 그리움인가


밭 아래 개울물소리가 한결 살가운 오후

칡넝쿨과 환삼덩굴에 오래 묻혔던

옛난짓골 5,359평방미터의 땅이

측량사 손끝에서 또렷이 되살아나고 있다.


그믐처럼 어두웠던 아버지의 얼굴이

마침내 아침처럼 환해지는 것을

나는 그 옆에서 오래오래 지켜보고 있었다.




[동상]

番地(번지)

허윤숙



들짐승처럼 드러누운 갈대 숲

허리를 따라 생명이 흐르고

바위 곁에 꽃을 달고

하늘 아래 씨앗을 내며 사는 처녀.


긴 장대 하나 꼽는다.

처녀를 시집보내기 위해

건장한 사내 둘이 장대 하나 깊숙이 꼽는다.


긴 머릿결에 붉은 깃 줄 하나 묶어

가슴을 드러낸 보얀 언덕에서

갈라진 개울까지

경계선 하나 그어낸다.

물결처럼 출렁이며 선 하나 휘어지고

이름을 얻어 기쁜 갈대 군락지 옆으로

자유롭게 지나가는 미풍 한 줄기

구불랑 새 번지를 찾아가는 참 지렁이 한 마리


드디어 처녀는

새로운 번지 하나 얻어

이 땅의 족보에 이름을 올렸다.


욕심같이 구역 하나 들춰내며

지렁이가 집을 짓고 정착하는 곳


기쁜 해바라기 장대를 딸라 피어가고

참새 떼, 꽃 대궁 속에 둥지를 낸다.




[동상]

조은경



고단한 새의 날갯짓처럼 스러져가는 길은

깊은 밤을 지우고 나를 지우네

푸른 혈관처럼 흘러 나간 길들은 순도 높은

달처럼 서늘한 시선으로 나를 노려보네

목적지도 없는 기차가 달리다 멈추어 선 곳엔

희미한 이정표가 눈 내린 자작나무숲으로 달뜬

발자국을 남기며 사라져갔네

그리운 누군가의 소식을 싣고 불어오는 무성한

바람은 차갑게 식은 내 목덜미를 깨물고 끝없이 펼쳐진

계절 속으로 창백한 부음처럼 침잠해가네

그해 가을 바스락거리던 마른 낙엽은 당신계 향하는

그리움을 아스팔트 위로 떨구고 저 멀리 뿌리처럼 뻗어나가네

땅거미 내린 마당에 그늘을 닮은 그림자가 서서히 번져갈 때

가문 삶처럼 아가리를 벌린 길 위에 나는 홀로 서 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