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행덕 시 세계

콩나물시루 속의 여자

湖月, 2025. 5. 10. 16:36

 

콩나물시루 속의 여자 / 안행덕

시루에 앉은 첫날 세상은 캄캄했지

한바탕 야윈 몸살 서럽게 울음 울고

어둠에 익숙해지며 살아있어 놀랐네

꼬투리 부풀듯 마음도 부풀어서

가슴속 그리움이 물소리로 흐를 때

동이 속 어둠이 키운 사각사각 한 여자

담황빛줄기 끝에 고운 듯 가녀린 발

생명의 노래처럼 달싹이던 서러움에

눈물을 질금거리다 환해지는 저 여자

해녀 (海女) / 안행덕

갈매기 둥지 찾아 파도를 넘나들 때

바다를 품어 안고 거친 숨비소리

모진 생 바다에 싣고 꿈을 캐는 아낙네

그 질긴 생명줄을 수평선에 걸쳐 놓고

손안에 쥐어 보는 싱싱한 소라 전복

하얗게 숨을 고르며 삶의 부표 당긴다

짠물에 불어 터진 어미 손 애달프다

바다가 알겠는가 한 많은 깊은 설움

오리발 빗금 긋는 자맥질만 푸르다

봄이 오는 소리 / 안행덕

얌전히 사분사분 내리는 이슬비

잔설을 녹여내는 정다운 수런거림

온종일

속살거려도 끝이 없는 저 수다

봄 오는 길목마다 꽃들의 시새움

개나리 진달래 꽃다지 달맞이꽃

배시시

웃네 봄바람 간지럼 참지 못하고

봄바람 유혹에 옷고름 풀리는 듯

冬安居 풀려서 기지개 켜는 소리

봄비에

젖은 흙 깜짝 놀라 깨어나는 소리

산 채로 잡아라 / 안행덕

그물을 던지라 전어 떼가 온다

그물을 펼치라 산 채로 잡아라

둥글게

둥글게 돌아 한 방에 잡아보자

그물을 던지라 전어 떼가 온다

재빨리 움직여서 산 채로 전어를 잡자

고소한

그 맛을 아는 갈매기 떼 지어 온다

우리 입맛 사로잡는 싱싱한 전어회

깻잎 위에 올리고 그 위에 풋고추 올려

가을의

입맛에 맞춰 한 쌈해보자 전어를 잡아라

청보리 푸른 꿈 / 안행덕

영하의 강추위 춘풍으로 달래도

바람 손 보리밭을 흔들고 지나가면

청보리 파래진 입술 파르르 떨고 있네

밭이랑 사이마다 피어난 그리움들

들판의 저 푸른빛 내 유년 거기에 있네

푸른 꿈 가슴 앓이로 흔들리던 옛 추억

들판은 그대로인데 내 청춘 간곳없고

세상사 까칠해도 지난날은 달콤해라

청보리 익어가는 봄 비바체로 흔드네

시집 『꿈꾸는 의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