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슈킨 기념 문학상 ㅡ 우수상
퓨슈킨 탄신 209주년 기념문학축전 우수상/안행덕
항해 / 안행덕
검은 고무 튜브에 하반신을 감추고
납작 엎드린 채 헤엄을 치는 사내
하반신의 폐허에 도마뱀 꼬리처럼
돋아난 고무 지느러미를 흔들며
시장통을 유영한다
오물이 질펀한 바닥에 쉼표를 찍고
행간을 치는 사이
퍼렇게 날이 선 시선들이
추위에 떠는 차가운 심장을
인정 없이 냉각시킨다
파도처럼 밀려왔다 밀려가는 인파
뱃고동처럼 발걸음 소리만 울릴 뿐
등대 같은 적선의 빛은 없어라
진종일 사나운 파도에 지친 시린 눈빛
안쓰럽게 지켜보던 좌판의 노파
끌끌 혀를 차며 지폐 한 장 던진다
좌초될 듯 흔들리던 고무 지느러미
그제야 두려움 없이 인파를 헤치며
거친 바다를 건넌다.
수의를 짓다 /안행덕
떨리는 손으로
어머니 수의를 짓고 있습니다
머지않은 날
홀연히 가신다기에
노란 안동포 삼베 한 필 끊어다
어여쁘신 날개 수의를 짓고 있습니다
빈손으로 왔으니 빈손으로 가야한다고
주머니조차 만들면 안 된다 하십니다
이승의 맺힌 마음 저승으로 가져가면 안 된다고
매듭을 지어서도 안 된다고 하십니다
실 끝을 옭매지도 말라 하십니다
치자열매 노란 빛깔 흘러나오듯
어머니 지나오신 발자국이
눈물에 번져 흐려집니다
한 많고 설움 많아 떨치기 힘든 세월
차마 놓지 못하시고
눈꺼풀 무겁게 붙들고 계십니다
훨훨 가볍게 한 세상 날아오르시라고
금빛 날개 고이 달아
어머니 수의를 짓고 있습니다
내 바람 되거든/ 안행덕
제상 위에 다소곳한 어머니
흑백 사진틀에 갇히신지 어언 20년
해마다 그 자리 그곳에서 젖은 눈으로
어김없이 나를 기다리신다.
경전을 펼쳐 놓은 듯 차려진 제수 사이로
파릇파릇 새순처럼 돋는 그날들
봉숭아 꽃물을 들여야 저승길이 밝아진다고
손가락을 흔들며 내밀던 파리한 손
안개 같은 추억이 향처럼 피어오른다
퇴주잔에 술잔 비우는 내 손가락
어머니를 닮아가는 걸 이제 알겠네
눈물 같은 촛불 앞에 나는 어머니와 잠시 마주앉아있네
어머니의 情 뜨겁게 내 손끝에 전해지고
부드러운 음률로 들려주던 그 사랑 노래
내 몸 안에 붉은 점자로 율법처럼 찍혀가네
조금씩 희미해지는 그 빛이 두려워
후다닥 일어서 축문에 불을 붙이고
뜨거운 고백 고운 넋, 두 손으로 받들어
재가 된 당신을 바람에 실어
어느 하늘가 그곳에 보내드리고
내 바람 되거든 그때 허공에서 다시 만나리
퓨슈킨 기념 문학상 (수상 소감)
안행덕
어릴 때는 꿈을 먹고 자라고 늙어서는 추억을 먹고산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그건 옛말이다 세월이 달라진 것이다
나이가 들어도 꿈을 키우고 보람을 찾으며
허전하게 비어가던 가슴에 아름다움으로 채색되어 감을
느끼며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채워야 할지를 조금씩 배워 가는데
마음속에 香氣로운 꽃처럼 피어나는 시심을 살아있는 활자를 만들어
누군가에게 꿈과 희망을 준다면 더없이 행복한 일이다
며칠 사이 계절이 바뀌었다
더위에 지쳐갈 지음 선들바람 불어 주듯이
지루한 일상이 이어지고 회의적인 날 퓨슈킨 기념문학상 우수상 통지서는
더위를 식혀주는 선들바람처럼 신선했다
생각지 못한 큰상에 선 해주신 심사위원님께 감사드립니다.
뽑고 나서
심사고문 황금찬, 김남조, 구인환, 이근배
퓨슈킨! 그가 탄생한지 209주년이 흘렀다 러시아의 정신, 퓨슈킨을
숭모함은 그의 문학정신이 세계인의 마음속에 양식이 되기 때문이다.
이번에<문예춘추>가 시행하는 퓨슈킨 문학상에서의 수상자 배경은
두말할 것 없이 존경의 뒷받침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존귀함 때문이리라.
많은 수상 신청자 가운데 우수성, 가치성, 문학적 표현성, 작품 연조의 노련 성
등등을 참작하였다.103통의 작품 중에서 고르고 고른 작품 들이다.
뽑힌 분들께는 영광일 테지만 뽑히지 않은 분들께는 미안하고 안타까운 일이다.
심사 팀으로서 깊은 사의를 표한다. 대상을 받으신 분들 일곱 분들의 경륜은
장르별로 대단하고 그 작품성도 우수하다. 최종규, 김원중, 이용우, 이창규, 김정인, 정대연, 최중호, 이분들의 문학적 중후함을 엿볼 수 있다.
최우수상의 기준은 작품성의 기준으로 볼 때 상당한 달관의 경지에 이른 분들이다.
열 세분 모두가 문학 열정적인 것을 엿볼 수 있었다.
조인산, 강봉희, 최장길, 김석현, 전인숙, 이용호, 노태웅, 이강흥, 박병희, 최윤표,
형경숙, 정정근, 윤옥희 배병수, 대상에 버금가는 문학적 진지성을 지니고 있었으나
간만의 차를 두고 심사팀에서 상당한 의견조율로 이루어졌다.
우수작에서도 마치 한가지이다. 세분 모두 창작 정신을 갖고 있다는 판단이다. 안행덕,
이종영 박유동 이세분 들의 작품성도 최우수에 맞설 작품이었으나 단지 문학성만 보는것이 아니었고 문학의 본질 압축과정에서 분류된 것이다. 그러니 대상이나 최우수상이나 우수상이나. 각기 장르적 구별과 작품성의 경향에 따른 것뿐이지 다른 의미는 없는 것임을 양지하시기 바란다. 그러나 많은 신청자 속에서 유독 뽑힌 이 영광을 축하드린다. 퓨슈킨 이란 이상의 이미만을 봐서도 큰 영광이 아닐 수 없는 일이다.
건강하시고 좋은 작품 많이 생산해 주시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