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미와 베짱이

한편의시가 태어나기까지 ㅡ 고재종

湖月, 2005. 12. 23. 22:25
4. 관찰하는 눈을 가져라


조지훈 시인은 글을 잘 쓰려면 눈은 과학자를 닮으라고 했다. 이 말은 사물을 관찰하는데 치밀하고 날카로운 눈을 가지라는 뜻이다. 우리는 평범하고 예사롭기만 한 사물이나 현상도 예리한 관찰을 통해서 전에는 알지 못했던 뜻밖의 사실이나 모습을 발견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때에 새로움과 기쁨이란 우리들의 삶의 얼마나 큰 활력소가 되는지 그것을 체험해 본 사람만이 알 수가 있을 것이다. 실상 우리들은 주변의 모든 것에 익숙해져 있고 낮이 익어서 별반 새로움을 느끼지 못한다. 이것을 봐도 무덤덤하고 저것을 봐도 시큰둥하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타성에 길들여진 우리들의 고정적인 생각일뿐 세상의 모든 사물은 어느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변화한다. 끊임없이 새로운 모습으로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아침에 본 꽃의 모양과 빛깔이 다르고 점심 때와 저녁 때도 각각 다르다. 또 빛의 각도, 세기, 밝기, 등에 따라서 꽃은 시시각각 변한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것을 똑같은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그들의 섬세한 변화를 무심하게 지나쳐 버리는 것이다. 적어도 시를 쓰려고 하는 사람들은 사물 하나를, 그리고 자기 주변의 현상들을 주의 깊게 볼 줄 아는 섬세한 눈을 갖고 있어야한다.

여느 사람들 모양으로 사물을 대하는 태도가 무덤덤하고 무시경해서는 절대 좋은 시를 창작할 수가 없다. 정확하고 예리한 관찰을 통하여 자기의 눈으로 본 사물들의 의미를 붙잡을 수 있어야만 시가 우러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찰의 중요성을 강조한 작가가 플로베르다. 그는 한 개의 모래알도 똑같지 않을 정도로 묘사하라고 했는데, 이 말은 그만큼 사물을 정확하게 관찰하라는 이야기다.

이런 플로베르를 스승으로 모시고 글쓰기를 배운 사람이 바로 19세기 프랑스의 사실주의자 모파상이다. 그는 자신의 표현력이 시원치 못함을 느끼고 플로베르에게 표현의 비법을 물었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간단했다. "날마다 자네 집 앞을 지나가는 마차를 관찰하고 그것을 기록하게나. 글쓰기의 가장 좋은 연습이라네." 모파상은 스승의 말에 따라 한 이틀 동안을 관찰해 보았지만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그것은 너무나 단조롭고 따분해서 실상 관찰할 필요조차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플로베르는 이러한 생각을 갖고 찾아온 모파상에게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관찰이야말로 훌륭한 글쓰기의 연습인데 어째서 쓸모 없다고 하는가? 자세히 살펴보게나. 개인 날에는 마차가 어떻게 가며 비오는 날에는 어떤 모습인가. 또 오르막길을 오를 때 는 어떠한가? 말몰이꾼의 표정도 비가 올 때, 바람이 불 때 또한 뙤약볕 아래서는 어떻게 변화하는지 살펴보면 결코 단조로운 것이 아닌 것을 알게 될 거네." 그후 플로베르는 모파상이 원고를 가지고 올 때마다 더욱더 관찰하는 눈을 갖출 것을 요구하고 모파상은 끊임없는 글쓰기를 연습함으로서 후에 명작을 남길 수가 있었다. 중국의 저명한 서예가 왕희지 또한 그의 독특하고 개성적인 필체가 그의 관찰력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그는 거위를 무척 좋아하여 그것들을 기르며 관찰하는 것을 즐겼다고 하는데, 특히 연못에서 헤엄칠 때 물을 힘차게 가르는 거위의 발동작을 유심히 관찰한 결과 여기에서 새로운 운필법을 창안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관찰이야말로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개성과 독창성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고, 새로움들을 창조해 내는 것을 생명으로 하는 시 창작에서는 아무리 이것을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고 , 기계적인 관찰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형식적이고 기계적인 관찰은 사물에 대한 우리들의 관습적인 시각의 연장일 뿐이며 피상적인 모습만을 보게 만든다. 따라서 사물을 정확하게 보아내기는 고사하고 그것이 지닌 새로운 의미도 결코 발견할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의 사물을 제대로 관찰한다는 것은 우선적으로 상투적인 인식에서 벗어나는 일이며, 애정과 관심을 갖고 그것의 아름다운을 찾아내기 위해서 집중적으로 마음의 눈까지 열어 보이는 행위이다. 이때 사물을 경이로움과 눈부심으로 자신들의 모습과 의미를 우리 앞에 드러내 놓게 된다. 땅에 떨어지는 아무렇지도 않은 물방울 사진으로 잡으면 얼마나 황홀한가? (마음으로 잡으면!) 순간 튀어올라 왕관을 만들기도 하고 꽃밭에 물안개로 흩어져 꽃 호흡기의 목마름이 되기도 한다.

땅에 닿는 순간 내려온 것은 황홀하다. 익은 사과는 낙하하여 무아경으로 한 번 튀었다가 천천히 굴러 편하게 눕는다. -황동규, <풍장 17> 위의 시는 시인의 눈과 마음이 하찮은 '물방울'에 다가가서 섬세한 관찰이 얼마나 이 시적 대상의 아름다움을 끄집어낼 수 있는가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너무나 흔하고 사소해서 그야말로 '아무렇지도 않은 물방울'아 시인의 눈과 마음을 통해 우주적 의미와 존재로서 무한하게 확대되고 있음을 느낄 수가 있다.

시 창작을 위한 관찰이란 바로 이러한 것이여야 한다. 작은 사물 속에 깃들인 큰 세계, 큰 의미들을 놓치지 않고 잡아내어 그것을 알고 언어로 표현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주변을 한번 둘러보라. 거기에는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들이 별로 없는 것 같아 어떤 이들은 쓸거리, 즉 창작 소재의 빈곤을 고민하기도 한다. 그러나 늘상 보던 낡고 진부한 눈을 빼 버리고 새롭게, 새로운 마음의 눈으로 사물들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거기 무엇인가가 숨어있는 것을 우리는 발견하게 될 것이다.

5.따뜻한 가슴으로 사물을 보라


"시인은 꾀꼬리처럼 어둠 속에서 그 고독하고 감미로운 목소리를 부르며 사람들을 위로 해준다."라고 영국의 시인 셸리는 말했다. 우리는 셸리의 이 말 속에서 시인의 가슴이 어떠해야 하며, 시의 자리가 어디에 있는가를 어렴풋이 짐작하게 된다. 아마도 그것은 세상과 인간을 향한 따뜻한 사랑과 위로로써 우리들의 아픔과 슬픔을 어루만지는 자리에 시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한다.

나는 시의 이런 모습을 보면서 그 밑바닥에 깔려 있는 사랑을 모성적 사랑이라고 말하고 싶다. 모성적 사랑은 모든 사랑의 근원이다. 아무런 조건과 이해타산 없이 순수하게 자신이 지닌 것들을 내어 주며 한없이 베풀어 주는 사랑이다. 생명이 지닌 상처들을 기꺼이 감싸안고 포용하는 그 융숭한 사랑이야말로 사랑이 지닌 가장 본질적인 모습이며, 이런 사랑의 실체가 곧 우리들 어머니이다.

그래서 모성적 사랑은 우리 인류에게 영원한 지표요. 신앙이요. 구원이다. 결코 어떤 무엇으로도 훼손될 수 없는 사랑의 원형이다. 우리가 어머니를 회귀하고 싶은 영원한 고향으로 여기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시 속에서도 이러한 모성적 사랑이 근원적으로 흐르고 있다. 왜냐하면 시는 뭇 생명들에 대한 뜨거운 연민과 안타까움의 노래이자, 생명을 위한 노래이기 때문이다.

또한 모성이 모든 생명을 탄생시키는 생명의 원천이며, 그것들을 품고 기르는 위대한 창조성의 본(本)인 것 처럼 시 역시 온갖 사물들을 품으면서 그것들이 지닌 의미와 아름다움을 새롭게 창조해 내는 것이므로 모성과 시는 그 본질에서 서로 통한다. 그러므로 시를 창작하려는 사람이라면 어머니의 가슴이 되어 세상과 사물을 넉넉하고 깊게 포용할 줄 알아야 하고, 여기에 인간으로서 지닌 지순한 사랑도 담아야 하는 것이다. 어디서 나왔을까 깊은 산길 갓 태어난 듯한 다람쥐 새끼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있다

그 맑은 눈빛 앞에서 나는 아무 것도 고집할 수가 없다 세상의 모든 어린것들은 내 앞에서 눈부신 꼬리를 쳐들고 나를 어미라 부른다 괜히 가슴이 저릿저릿한 게 핑그르르 굳었던 젖이 돈다 젖이 차 올라 겨드랑이까지 찡해오면 지금쯤 내 어린 것은 얼마나 젖이 그리울까 울면서 젖을 짜 버리던 생각이 문득 난다 도망갈 생각조차 하지 않는 난만한 그 눈동자, 너를 떠나서는 아무데도 갈 수 없다고 갈 수도 없다고 나는 오르던 산길을 내려오고 만다 하, 물웅덩이에는 무사한 송사리떼 -나희덕, <어린 것> 다람쥐 새끼를 보고도 젖이 도는 어머니의 마음이 곧 시인의 마음이다.

이것은 동시에 모든 생명을 향해 열려있는 뜨겁고 깊은 사랑이다. 시를 쓰는 사람들은 세상의 모든 사물들이 "내 앞에 눈부신 꼬리를 쳐들고/나를 어미라 부르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하고, 그것들에게 젖을 물릴 수 있어야하며, 극한 상황에 처해있는 '송사리떼"에게도 애타는 모성의 눈빛을 반짝여야 한다. 비정하고 차가운 마음은 사물과 교감할 수가 없다. 아울러 뭇 생명들이 지닌 희열과 비극도 감지해낼 수가 없다.

우리로 하여금 한 인간에게 가장 깊이 가 닿을수 있게 하는 것이 사랑인 것처럼 사물 역시 사랑만이 그들의 가장 내밀한 세계까지 우리를 이끌어 가는 것이다. 그래서 시인이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사물이 시인을 통하여 시를 쓴다는 말까지 나오는 것이다. 모든 생명은 서로 사랑의 교환을 원한다. 비록 영성이 깃들이지 않은 무생물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마찬가지이다. 시의 궁극적인 모습은 이러한 생명들에게 주는 사랑의 노래다. 시인은 이것들을 가슴에 품고 가슴으로 느껴야 한다. 뭇 생명 속에 내재한 슬픔과 사랑을 느끼지도 못한다면 그건 시인이라고 할 수가 없다. 따뜻한 가슴으로 모든 사물을 바라보라. 그리고 안아 보라. 시는 영원한 모성인 것이다.

6. 고치고 또 고쳐라


동거고금을 막론하고 명작을 남긴 위대한 작가들에게는 퇴고에 의한 이야기가 무수하게 많다. 이러한 사실은 훌륭한 작품을 창작하는 비법이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만큼 퇴고에 열정을 쏟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어떤 작가들은 단숨에 써 내려간 글이 자신의 천재도 실패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처음부터 완벽할 수 없는 것이므로 거듭 다듬고 고치는 노력이 필요하다.

오히려 작품의 천의무봉()함은 수백 번 고치고 다듬는 과정을 통해서 생겨난다고 할 수 있다. 러시아에서 가장 아름답게 문장을 썼다는 투르게네프도 어떤 문장이든지 쓴 뒤에 바로 발표하는 일 없이 원고를 책상 서랍 속에 넣어 두고 석 달에 한 번씩 꺼내보면 다시 고쳤다고 하고, 글자 한 자마다 완벽함을 기했던 구양수도 초고를 벽에 붙여 놓고 방을 드나들 때마다 그것을 고쳤다고 한다.

심지어는 체홉과 톨스토이한테서 문장이 거칠다는 말을들은 고리키가 퇴고를 얼마나 열심히 했던지 옆에서 보던 친구가 "그렇게 자꾸 고치고 줄이다간 어떤 사람이 태어났다. 사랑했다. 결혼했다. 죽었다. 이 네 마디밖에 안 남아나겠군"하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고리키에게 문장이 거칠다고 했던 톨스토이 자신도 이 글을 다듬기에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던지 여기에 대한 유명한 일화를 가지고 있다. 한 젊은 작가가 톨스토이에게 창작에 관한 배움을 얻기 위해 그의 집을 방문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톨스토이는 외출중이었다. 집에 있던 사람은 그 젊은 작가를 서재로 정중하게 안내한 후 톨스토이가 곧 돌아올 테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말했다. 혼자서 서재 안을 서성이던 그는 책상 위에 수북하게 쌓여있는 원고 더미들을 발견하고는 호기심에 이끌려 그것들을 펼쳐 보았다. 그런데 그것들은 소설 <부활>의 제1차 미정고()에서부터 제10차 미정고 까지 쌓아 둔 것들이다. 이것을 본 청년 작가는 너무 놀라고 감동스러워서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꼼짝을 못한 채 멍하니 서 있었다. 이때 마침 외출에서 돌아온 톨스토이가 살그머니 그의 등 뒤로 다가가 어깨를 툭툭 치며 "이상스러운가?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네"하고 말한 후 서류 궤 안에 들어있던 다른 원고들을 보여주었는데 그것은 <전쟁과평화>의 90여종이나 되는 미정고들이었다. 그는 이 미정고들을 보면서 창작의 방법들에 대해서 더 이상 아무것도 톨스토이에게 묻지 않았다.

다른 어떠한 말이나 가르침보다도 톨스토이의 미정고들이야말로 창작의 비결이 무엇인가를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헤밍웨이도<노인과바다>를 쓸 때에 400번 이상을 고쳐 썼다고 하니 작품이 탄생되기까지는 수백 번을 다듬고 고치는 지극한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깨달을 수가 있다. 더구나 시는 어떠한 문학보다도 엄격한 창작태도를 요구한다. 언어 하나의 정확함에서부터 문장부호 하나까지도 시의 전체적으로 흐르는 분위기, 호흡, 리듬, 질서에 관여한다. 그리고 그것들은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서로 유기적인 조직들을 이루어야 하는데, 퇴고를 하지 않고서는 이런 극도의 치밀함이 생겨날 수 있는 없다.

아울러 제대로 된 시도 탄생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붓놀림이 신선 같다던 두보조차도 "시언(詩言)이 사람들을 놀라게 하지 않으면 죽어서도 시 다듬는 일을 쉬지 않는다."고 하며 자신의 시를 퇴고하는데 참담할 정도의 노력을 쏟았던 것이다. 농부가 씨앗을 뿌리고 알곡 한 톨을 얻기까지 수백 번의 손길이 못지 않게 거듭 매만지고 다듬는 퇴고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이 시다. 이규보가 '시에 적합하지 못한 9가지체'를 이야기하면서 "글을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은 것 은 잡초가 가득 찬 밭"이라고 말할 것도 이러한 이유일 것이다. 그러므로 시를 고치고 다듬는 일에 게을리하지 말며, 가벼이 여기지 말라. 죽어서도 시 다듬는 일을 쉬지 않겠다던 두보의 각오로써 자신의 시를 끊임없이 다듬는 노력과 정성이 좋은 시를 창작케 하는 지름길이며 비법인 것이다.

7.자연에게 배우라


자연은 뭇 생명들의 근원지이며 원형이며 모태이다. 뭇 생명들의 총체이자 본질인 것이다. 인간 역시 이러한 큰 생명체[자연]에서 뻗어나 온 한 부분인 까닭에 자연과는 결코 떨어지 수 없는 관계에 놓여 있다. 오래 전부터 동서양을 막론하고 자연은 문하그이 모방 대상이었으며, 재현해야할 '진실'의 척도가 되었다.

알렉스 프레밍거도 그의<시학사전>에서 언급하길 "자연이야말로 문학의 진실성을 가늠하는 기준이며 시학의 개념"이 된다고 하였다.이는 자연이 우주적인 질서와 법칙, 순리를 지녔을 뿐만 아니라 생명의 본질과 진실을 구현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시는 생명의 노래이다. 생명의 발현이고 소망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시는 생명의 총체이며, 생명의 원형이 자연에 맞닿아 있다.

인간이 자연과 한몸인 것처럼 시 역시 자연과 하나가 될 밖에 없는 운명이다. 그래서 조지훈 시인은 시를 가리켜 "시인이 창조한 제2의 자연"이라고 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생명의 모태인 자연을 통해서 뭇 생명들의 비의와 참모습을 발견할 수 있고 그것들을 끄집어낼 수가 있을 것이다. 시를 쓰고자 하는 사람은 그 누구보다도 이 자연을 자기의 스승으로 삼아야한다.

자연은 장황스런 설명 없이 물음에 대한 해답을 스스로 보여준다. 우리가 아름다움이란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 묻고 수많은 언어를 통해 그것을 이해했다고 하자. 그러나 저 물가에 혹은 저 산 속에 피어 있는 한 송이 꽃을 보는 순간 아름다움의 실체를 느끼게 된다. 머리로써의 이해가 아니라 자신 전체의 체험으로써 아름다움의 본모습을 깨닫도록 해주는 스승이 바로 자연이기 때문이다.

자연은 아무런 꾸밈이나 기교 없이 명징하게 생명의 참모습들과 현상들, 더 나아가서는 그 생명의 아름다움 본질을 알려준다. 우리들이 얼크러진 삶의 실타래마저 정연하게 만드는 힘을 갖고 있다. 또한 때묻고 탁해진 우리들의 마음과 눈을 순수한 빛으로 다시 채워준다. 그리고 더욱더 중요한 것은 언제나 새롭게 생성하고 변화하면서 운행하는 그들의 모습이다. 나는 지금껏 '자연이 낡았다, 자연이 진부하다, 자연이 질린다, 자연이 틀에 박혔다'라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다.

낡고 타성에 젖는 것은 우리들의 몸과 마음이었을 뿐 자연은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생성하면서 그때그때 순간마다 최선으로 제 생명을 누리고, 제 존재의 아름다움들을 발산하고 있는 것이다. 시 창작은 자연의 한 부분인 우리들에게서 점점 소멸해 가는 이러한 생명들의 참모습을 되살려 놓는 작업이다. 즉, 잃어버리거나 망각해 가는 우리의 참 본질을 되찾는 일인것이다. 천년 전에 하던 장난을 바람은 아직도 하고 있다. 소나무 가지에 쉴새 없이 와서는 간지러움을 부고 있는걸 보아라 아, 보아라 보아라 아직도 천년 전의 되풀이다. 그러므로 지치지 말 일이다.

사람아 사람아 이상한 것에까지 눈을 돌리고 탐을 내는 사람아. -박재삼, 천년 전에 하던 일을 바람은 지금도 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타성적인 되풀이가 아니라 영원한 새 모습이다. 바람[자연] 그 자체가 새로움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위의 시는 우리 인간에게 자연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새삼 깨닫게 해준다. 뭇 생명들의 원형이며 끝없이 새로움 그 자체인 자연, 이 자연이야말로 시 창작자들에게는 영원한 물음이며 또는 해답이기도 하다. 자연에 깊이 다가갈수록 우리는 생명의 본 고향에 인도될 것이며, 거기에서 무엇인가를 만나고 깨닫고 발견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