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행덕 시 세계

호월 안행덕시인 시 읽기

湖月, 2013. 8. 29. 11:03

 

호월 안행덕 시인 시 읽기

 

시인과  여인 사이의 절묘한 하모니 ㅡ  최성린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아마도 능소화가 한창일 만한 그런 때 였을 게다. 전통 한옥 담장 위에 흐드러지게 핀  능소화를 찍은

결작 사진과 함께 인터넷 문학카페에 올린  같은 제목의 시를 통해서 안행덕 시인이 내 가슴속에 확실하게 자리잡게 된것은. 

세월이 약이라니요/ 날이 가면 갈 수록/ 쌓이는 그리움을 어쩌라구요

행여 님의 발걸음 소리일까/ 나팔처럼 커지는 내 귓바퀴를 보세요...........후략.

우리가 나팔꽃으로 부르는 꽃은 영어로는 Morning glory 이니 아침의 영광이라고 옮김직하고 능소화는 Trumphet flower 니

나팔꽃이라고 옮길 만 하다.능소화를 두고 나팔꽃처럼 커지는 내 귓바퀴를 보세요 라는 기막힌 표현을 해 낸  것이 단순히

눈에 보인 대로 그리 한 것인지 영어 이름을 유추해서 그리 한 것인지는 알 수가 없지만 어떻더라도 충격이었다.

 

시, 특히 1970 년대 부터의 시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게 된 나는 아마도 거의 사십 년 가까이 시를 거들떠보지 않고 지내왔다.

그러던 내가 다시 시에 조금쯤 눈을 돌리게 된 것은 순전히 인터넷 문학카페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늘그막에 그저 심심풀이 삼아

오랫동안 손을 놓았던 글쓰기 공부나 좀 해 볼 요량이었는데 인터넷 문학카페란 데가  나같은 아마추어들의 놀이공간 비슷한

데 인지 대체로 미숙한 글들이 판을 치고 있었다. 그런데 간혹가다 내공이 깊어보이는 대가풍의 작품들이 올라오기도 했다.

그래서 눈여겨 보아온 분 들이 대 여섯분 인데 문단 사정에 워낙 어두운 지라 그 분들이 문단에서 어떤 대접을 받는지는 아직도

캄캄하다. 다만 내 깜냥대로 스승으로 모실 만하다 싶으면 서로이웃을 맺어 두었다. 한 열달 쯤 지내다가 카페활동을 접은 다음부터는 블로그로 왕래하면서 안부를 주고받는데 드릴 건 없고 그저 배워오기 만 하니 아주 죄송스럽다.

 

뒤늦게 글쓰기 공부를,그 것도 하는둥 마는둥 하는 주제에 감히 안행덕 시인 같은 분의 시세계에 대해서 이러쿵 저러쿵 할 엄두는

나지않지만 후학으로서, 그저 한 사람의 애독자로서 내가 그를 좋아하고 스승으로 삼고싶어하는 이유쯤은 털어놔도 괜찮지 싶다.

그분의 블로그를 방문 할 때마다 나는 호기심과 기대로 조금씩 설레는 마음을 느낀다.그것은 마치 어릴 적에 어머니나 큰누님이

애지중지하던 손때 묻은 반짓고리를 열어볼 때의 작은 흥분 같은 것이다. 사내아이인 내게는 전혀 짐작이 안가는 갖가지 물건들,

크고작은 바늘부터 색색의 실타래,앙징맞은 손가위, 작은 줄자,가자각색의 단추들 ,형형색색의 헝겊들, 그리고 용도를 잘 모르는

여러가지 신기한 물건들이 질서도 정연하게 갈무리 되어있는 그 반짓고리는 얼마나 황홀했던가!

재주도 많고 끼도 많은 안행덕 시인의 블로그는 한번 들어가면 시간가는 줄 모르고 헤매다니는 꿈의 궁전같다.

 

정리벽이 좀 있으신가, 시 만 하더라도 신작시,파랑새와 참빛,흐르는 강물처럼, 어떤 개인날,황혼의 들녘에서, 연가 등

아직도 어떤 기준으로 분류된 것인지 나는 잘 알지 못하는 당신만의 분류법으로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다 . 한시며 산문과 수필

고전과 고적, 기행문 등, 참으로 다양한 볼거리 읽을거리가 무궁무진하게 펼쳐진다.그러나 무엇보다도 내게 좋은 것은

가히 도서관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신.구시대 시인들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는 점이다.컴퓨터에도 상당한 조예가 있으신지

사진, 동영상, 스워시, 음악 등 시청각 자료들이 풍부하게 저장되어 있으니 꿈의 궁전, 결코 과장 아니다. 

이러한 블로그의 구성 만 접하더라도 나는 단박에 여인네의 소중한 반짓고리를 열어 볼 기회를 얻은 선머슴애로 돌변한다.

그러나 그 신나는 구경은 그저 구경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옹골찬 시인의 엄한 훈도가 옷깃을 여미게도 한다.

 

모던포엠이라는 시 전문 잡지 포커스란 꼭지에 실린 안행덕 시인의 모습은 아주 단아해서 사진만으로는 그 분의 나이를 제대로

헤아리기 어렵다. 어찌 보면 올해에  환갑을 맞은 내 또래 같아 보이고 또 어찌 보면 좀 더 위 일 것 같기도 하다.

완숙한 시풍으로 보나, 스승으로 모시고자 한 내 바람으로보나  죄송하지만 나보다는 다섯 살 쯤 누님이었으면 좋겠다.

이 일로 나중에 눈흘김을 당하게 되더라도 너스레 떨고 넘어갈 자신 있으니 그거야 그 때 가서 치루면 될 셈일 테고

어쨋든 그 사진에서 보는 시인의 조금은 깊고 살짝 각져 보이는 눈매가 아주 기분이 좋다. 얼마나 총명해 보이시는가!

야무지고 당차 보이는 그 눈길로 톺아보고, 섬세하게 빚어 낸 그분의 시는 언제나 잘 빚은 송편처럼 윤기가 난다.

초로의 황혼기를 맞아 지나간 세월을 아쉬워 하며 아직도 고단한 삶을 투정부리는 목소리 조차 청승맞기는 커녕 단아하기만하다.

 

너는 참 편하겠다/ 기댈 곳이 있어서 / 살포시 등받혀 기대어 서서

조롱조롱 달린 / 새끼들 재롱에 / 팽팽한 꿈을 키우는 구나

 

수 많은 날 / 홀로 외로이 서 있는 나 / 고추 모종 지줏대를 세우며

빈 가슴에 휘도는 바람 / 흔들리는 마음에 / 나도 지줏대 하나 세워 묶고싶다

 

나도 기대고 싶다 란 제하의 이 시를 대하면 천상 여인이로구나 하는 느낌과 더불어서 참 대단한 시인이로구나 하는 경외심에

가슴이 턱 막힌다. 내가 시에 흥미를 잃게 만들었던 현대시인들, 그 잘난 표현주의자들의 알쏭달쏭한 시어들에 비하면

이 얼마나 간결하고 명징한 울림인가 ! 아무런 해설도 필요없이 황혼길에 들어선 여인의 굴곡진 삶과 그 애환이 곧바로

가슴에 날아와 꽂혀서 같이 아파하고 같이 한숨짓게 만들게 하니 시인의 언어를 조련하는 솜씨는 이미 한 경지에 이르렀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이 것이 그저 내 취향이라고 한대도 공부가 한참 모자라니 조목조목 이유를 대서 반박할 실력은 못되지만

그렇더라도 아무 상관 없다.좋으면 좋고 싫으면 할 수 없는 거지 무슨 눈치를 보려고 뭘 말하려 했는지도 잘 분별이 안되는

난해한 시를 두고 짐짓 고개를 끄덕여 보이겠는가!  나는 그저 시란 이렇게 써야 하고 이렇게 읽혀야 한다고 굳게 믿을 뿐이다.

 

거울속에 산맥같은 주름진 얼굴 

반평생 삶에 지친 빙벽이다

행여나 공든 탑이 무너질까 노심초사한 세월 

나만의 울타리를 조였던 침묵을 알기나 할까

봄볕에 한 음절 씩 풀어낸 익숙한 기다림

빙벽같이 얼었던 허전한 계곡을

환한 햇살같은 웃음으로 녹여주는 손주의 재롱

 

해빙의 후반부인데 좀 차이가 나거나 말거나 비슷하게 황혼길에 들어선 처지라 그런지 유독 안행덕 시인의 이런 노래를 들으면

나는 너무 쉽게 허물어진다. 그러나 공명하는 이유는 더 있다. 여인만이 경험 할 수 있는 세상이요 여인만의 섬세한 손길이다.

아직 없기는 하지만 손주의 재롱을 보면서 시름을 잊는 마음을 남자인 나는 죽었다가 깨어난대도 저렇게는 표현 해 낼 수 없다.

가부장적 권위와 남존여비의 유교적 논리가 아직도 탄탄하게 굳어져 있는 탓으로 여인의 애환을 읽어 낼 눈이 모자랐던 나지만

나이 들면서 여인의 섬세함과 여인만의 정갈하고 세련된 영역에도 제법 눈길이 가게 된 듯 하다. 그런 탓에 뒤늦게나마 여인다운

빛깔이 두드러지는 시세계가 있다는 것을 발견한 셈인데 그 건 전적으로 안행덕 시인 덕택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내가 툭하면

안행덕 시인의 블로그에 가서 꿈의 궁전을 하염없이 헤매곤 하는 이유일 것이다.그러다가 횡재도 한다.

 

하늘 끝 마른가지 높이 올라앉아

소리없이 목놓아 우는 새야

사연 많은 인생살이에 비하랴 만

바람 잘 날 없는 언덕배기 가지 끝에서

소리없는 네 울음이 낭자하게 굴러

검불같은 내 마음을 위로하는구나.

 

솟대의 후반부다. 어느 심신이 무척 지친 날 습관처럼 안행덕 시인의 블로그를 탐사하러 갔다가  이 시를 발견하자 마자 

그동안 나도 모르게 그 시인이 나의 솟대가 되어 그의 노래들이 검불같은 나의 마음을 위로해 주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내가 마음이 허한 날이면 어김없이 그의  사이버 서재를 뒤지고 다닌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마도 이런 것이 문학의 본래 기능이요 사회적 역할일 터이고 시의 효용일 것이다. 그러므로 감히 단언컨대 문단이 그를  어찌 대접하던  평론이 어떻게 그를 자리매김 하던 그 것과는 상관 없이 안행덕 시인은 큰 산이여 큰 그늘이다. 이것은 참 나로서도 전혀 예상 못했던 일이다.

페미니스트와는 멀어도 한참 먼 삶을 살아온 내가 존중받아야 하고 경외심을 느끼기에 충분한 여인들  만의 영역이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깨닫고 인정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는 말이다. 사실 조금은 혼란스럽기도 했다.

 

욕먹을 줄 뻔히 알지만  그거 무섭다고 솔직하지 못할 만큼 약지도 못하다. 변명같지만 우리 세대는 그렇게 살아왔었다.

세상이 그 만큼 바뀐  탓이겠지만 나쁜 일은 결코 아니다.잘 못 되었던 세상이 제 자리를 잡아가는 것일 테니까.

그래서 이 나이에 아무런 거리낌 없이 여성이지만 안행덕 시인을 스승으로 모시고 시를 배우려고 하는 것이다.

예전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을 텐데 그를 내 마음의 솟대로 삼아서 내 생의 마지막 기원을 하늘에 전하고 싶기도 한 것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한동안 나는 안행덕 시인을 바라보는 내 마음의 변화에 승복하지 못하고 혼자서 억지를 부려보기도 하였다.

그래서 그의 사이버 서재를 샅샅이 뒤지고 다니다가 그만 항복을 하고 말았다.엄청난 내공을 쌓은 흔적들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그의 서재는 그저 잔정 많은 여인네의 조금은 사치스러운 컬렉션이 결코 아니었다.

 

선계를 그리며

갖 핀 부용처럼 수련처럼

애잔하게 피었다 짧은 생애를 애닯게 울던 사람아

양류지사 흐르는 그대 걷던 호반에

눈섶같은 버들잎 사이로

저고리 고름 풀리듯 대금 한 자락 휘감긴다.

 

우리 역사상 최고봉의 여성 예술인이라 할 만한  난설헌 허초희를 기리는 난설헌 이란 시의 전반 은 이렇게 운을 뗐다.

나는 안행덕 시인의 목표를 짐작하고 고개가 주억거려졌다.난설헌의 절창 버들가지의 노래 양류지사에 필적할, 아니 그를 훌쩍

뛰어넘을 시 한편을 얻기 위해 온 생애를 바쳐 피나는 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던 초로의 여시인.

허초희를  마침내는  뛰어넘고야 말 목표로 정해놓고 요절한 천재의 짧았던 생애를 안타까와 하는 마음은 필시

안행덕 시인이 그 마음속에 난설헌을 솟대로 삼아놓고 예술을 향한 자신의 의지를 하늘에 고하고 있음이리라.

나는 문학에 특별한 뜻을 두고 살지 않았었기 때문에 시인의 이런 간절한 마음을 제대로 헤아릴 수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무엇이나 간절하게 바라기 때문에 하늘에 그 소원을 비는 마음은 다  똑 같다는 생각으로 시인을 이해하려고 한다. 

 

물 속의 어두움으로 묻힌 그대의 시간이

하나 둘 일어나 달빛처럼 호수를 흔들어도

선계의 도량 읽어내는 재주 없어

달빛 차가워 서럽기만 한 난초꽃 그림자이어라

채련곡에서 연꽃 던져놓고

반나절 부끄럽다 하더니 이제는 애타는 그리움 없고

부용꽃 떨어지는 애잔한 사연 같은 일 없을 터

그래서 나도 그대 계신 선계를 그리워하네

 

이 시를 온전히 이해하려면 먼저 난설헌의 일대기와 더불어서 안행덕 시인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양류지사나 채련곡 같은 

난설헌의 걸작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있어야 할 것이다. 또 연꽃 던져놓고 반나절 부끄럽다한 여인네의 섬세한 정서에도

정통해야 할 것이다. 그런 건 나한테 좀 버거운 일이다.그러나  시를 감상하는 일이 꼭 그렇게 무슨 개구리 해부하듯 해 봐야

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읽으면서 받는 느낌만 소중히 해도 그만이라는 생각에서 그런 수고는 처음부터 생략했다.

그렇더라도 같은 여인이라는 공통점 때문에 누구보다도 난설헌을 사모했고,글 뿐만 아니라 서화에도 정통했던 그녀를

흠모했던 안행덕 시인의 절절한 마음만은 이 시에 대한 이해가 좀 부족한데도 오롯이 전달된다. 이건 참 놀라운 일이다.

제대로 이해도 못하는데 무슨 감동이 있을거냐던 나의 평소 지론이 무색해진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한참 멀었다. 시란 어차피 노래니 잘 만든 노래라면 온전히 그 뜻을 다 헤아리지 못하고도

충분히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놓을 수 있는 것 아닌가? 마치 줄거리만 대충 알고 노랫말은 하나도 모르는

이태리말 오페라에 열광할수 있듯이. 나도 습작으로 시를 쓰지만 내 것과 안행덕 시인 사이에는 꼭 그만큼의 차이가 있으리라.

아무튼 나는 그리 오래지 않은 기간 안에 시인,하필이면 여성 시인 인 안행덕님에게 아주 푹 빠져 버렸다.

그러나 하나도 이상할 것 없다.그는 열심히 치열하게 공부 한 사람이니까. 그래서 높은 경지에 올라있고.

또 얼마 전까지 만 해도 전혀 몰랐던 여성만의 독특하고 섬세한 세상이 남자들 못지 않다는 걸 처음으로 알게 해 주지 않았더냐?

나는 틈만 나면  시인과 여인 사이에서 울려나오는 절묘한 화음의 세계를 맛보면서 새로운 즐거움에 빠져든다.

 

마침 계간 웹북에서 안행덕 시인의 특집을 마련했노라는 소식이 왔다.열편의 엄선된 시들을 보면서 작은 욕심이 하나 고개든다.

하도 오래전 일이라 파인 김동환이었던지 청마 유치환이었는지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라고

자신을 사슴에 빗대어 1950년대 격동의 세월을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아프게 노래하다 요절한 노천명 여사를 기리며

그 빼어난 여시인이 남긴 걸작들의 절구들을 절묘하게 한편의 시로 엮어 낸 그런 시 한편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다.

아마도 은연중에 안행덕 시인의 시풍을 노천명 시인의 그것과 비교하며 적지않은 동질성을 느꼈던 탓인가 보기도 한데

내 주제가 파인이나 청마같은 대가의 수준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터이니 아직은 그저 꿈으로 만 간직할 일이다 

그렇더라도 안행덕 시인이 엄선했을 열편 시의 절구들이 한꺼번에 파도처럼 밀려와 사정없이 내 가슴을 흔들어 놓는다

 

해마다 여름이면/ 비수처럼 다가오는 옛 추억에 / 분홍빛 채색으로 가슴적신다 -봉선화 추억

젊은 날 저 까치집처럼 엉성한 둥지 /옥탑에 올려놓고 애태우던 나 같다- 둥지-이렇게 애잔하게 젊은 날을 추억하기도 하고

길손을 기다리는 외로운 저 쪽배처럼 오늘도 잠방대는 그리움에 떠있는 여자 - 가을여자

행여 님의 발걸음 소리인가 / 나팔처럼 커지는 내 귓바퀴를 보세요 -능소화- 애닯은 여인의 정한을 향기로 흩날리기 하며

해 저물도록 밭이랑에서 허기진 허리 졸라매던 / 내 어미는 들국화 되었으리 - 들국화 - 라고 어머니를 추억하는 시인은

이미 추억하는 어머니의 나이 쯤 되었을 법 하다.그래서 세월의 아픔을 안고도 처연히 흐르는 강물같이 넉넉한 가슴이 되어

그 강물 처럼 속깊은 나이를 먹고싶어한다 .그러나 이 부지런한 대가에게 는 휴식도, 그저 퍼질러 앉을 게으름도 용납되지 않는다.

 

한 여인으로서 , 평범하게 잊혀지지 않을 시인이 되기위해 애태우며 종종거리고 지나온 한평생 굴곡진 삶이 얼마나 고단했으면

고춧대에 고추모종을 묶으면서, 너는 참 편하겠다 /기댈  곳이 있어서 - 나도 기대고 싶다- 에서처럼 라며 넉두리를 펴다가도

이내  태풍에 절단난 아카시아 나무가 등산로에 쓰러져 누운채로 모질고도 모진 생명력으로 새 순을 피워올리는 걸 보면서

스스로를 위로하듯 조용히 누워 / 기다림에 지친 세상에 초록의 연서를 쓰고있다 - 와목 - 이라는 찬사를 보내는 것으로 보아

안행덕 시인이 삭막할 대로 삭막해진  이 세상을 향해 띄워보내는  위로의 노래는 결코 그치는 일이 없을것이다.

어머니의 따뜻한 가슴으로 세상을 다독이는 시인의 노래는 여인 아니고는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원형질을 가지고 있다.

그 노래를 들으며 그 가락을 배우며 고단한 삶을 위로받을 수 있으니 나는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