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춘문예

2003년 신춘문예당선작

湖月, 2005. 12. 24. 12:13
농민신문
희생<하병연>

몸 낮추고 벼를 보아라
벼는 혼자 살려고 하지 않는다
스무사나흘 정도 살 맞대어 살다가
큰 논으로 분가하면
그때부터 다시 한달 보름 동안
자기 몸을 쪼개고 쪼개다 여름을 들인다
몸 낮추고 벼를 자세히 바라보면
이 여름 푸른 이유를 알 수 있다
눅눅한 장마철,
축축한 욕심 씻어낸 자리에
벼는 하늘과
시퍼런 사랑을 뜨겁게 해댄다
벼꽃이 피고 이삭이 영글고
몸 낮추고 벼를 보아라
벼 이삭이 혼자 익는 게 아니다
어미 없는 자식이 어디 있으랴
비우고 비워
탱탱한 사랑을 세상 밖으로 내놓는 가을
미련없이 털어버리는 벼는
또다시 제 몸 썩혀 반년의 생을 접는다


◈동양일보
윷놀이<서상규>

손때에 절은 박달나무 윷처럼
뻑뻑한 눈살로 초점을 모으고
전철노선도의 윷판을 올려다본다

미아삼거리에서
말몰이의 방향을 어디로 잡아야하는지,
이미 패를 정하고 말을 옮기는
윷놀이의 틈바구니에서
윷가락을 잡은 손아귀에 힘이 풀린다

역삼역 사거리로
말판에 부적의 길을 그려놓고
말의 근육을 부풀리는 환상
푸른 예감으로 이마에 정맥을 돋우며
고삐를 힘차게 다잡는다

철로의 침목이 발 밑에서 풀잎처럼 쓸리며
말갈기가 나부낀다
초원이 드넓게 펼쳐진 말판에서 윷쪽을 띄우는 힘찬 질주

지난밤 길몽을 이야기하는 아내 말과
두 딸아이의 말, 재롱에 취한다
한가족이 소풍 길처럼 단란한
방목의 꿈결에 사로잡힌 행상
도에서 모로 말발굽이 가르는
바람결에 곧은 길이 열린다

야성의 윷판에서 방심한 사이,
단속원의 올무에 걸려든다
그래도 생을 긍정하듯
붉은 낯빛에 구겨지는 웃음발을 끌며
고개를 끄덕끄덕 고삐 잡힌 걸음을 뗀다


◈대전일보
다 식은 연탄 한장<주광혁>

나에게도 연탄에 대한 추억이 있긴 있는 것이다
그러니 새파란 젊은 놈이
그땐 그랬지 하는 것인데

고추가 쫄아들도록 추워서
옴짝거리기 죽어도 싫은 겨울밤
냉걸 같은 구들장이 밉살스러워, 이불장 속
아버지 밥그릇을 매만지기도 하고
굼벵이처럼 이불 위를 굴러도 보면
번개탄 냄새가 싸아하게 들이치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꽃불이 핀 번개탄을
연탄 아궁이에 넣고,
새 연탄에 밑불이 옮겨 붙을 때쯤
가슴츠레 꿈자리를 만들어 주는
장판 위로 불쑥불쑥 솟아오르던 열대식물들
때론 한 사발의 동치미를 떠울리고는 잠이 깨고
꽉 찬 오줌보를 붙잡고 밖으로 나가
한 귀퉁이 식어가는 연탄에
확인하듯 오줌줄기를 쏘고
외롭고 쓸쓸한 겨울하늘을 보며 으스스 떨었던 것이다

지금, 다시 연탄이 감치는 까닭은
거울 앞에 서신 어머니의 센 머리오리 하나
유년의 겨울을 지피던 연탄불과 다를 게 없어서이다

쉽게 사랑을 말할 수 없지마는
그때 어머니에게 사랑은 한 장의 연탄 같은 것
조붓한 방안의 네 식구를 데우던 사랑을 생각하면
다 식은 연탄 한 장
기꺼이 외롭고 슬픈 별 하나 되는 것인데

나는 문득, 그 별이 유난히 높고 밝은 걸 깨닫고는
한참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무등일보
빌딩 숲 속에서 길을 잃다<김경옥>

빌딩 숲 어디에 새가 살고 있나
호르르르
호르르르
어느 구석에서 노랫소리 올라온다

(짝을 부르는)
긴 부리 아래
목울대 출렁이는 소리다
푸른 물 위, 깃을 스치며
한 마디 두 마디 가슴선 그려
저수지를 건너오던
빛깔 고운 청호반새
무너진 산허리 붉은 황토
절벽에 지은 구멍집 드나들던
그 새 소리다

탁, 무슨 새? 몰라 그런 거
그냥 벨소리보다 이게 좀 낫잖아

나 떠난 뒤
도시로 팔려와
핸드폰 속 전자음으로 갇혔구나

등허리에 디미는 칼
아프게 밀려오는 그리움
작은 눈 아득하게 감긴다, 돌아보니
사방에서 들린다
휘파람새, 동박새, 오목눈이 울음소리.


◈불교신문
강<이주렴>

1
깊이 흐를수록 뜨거워진다는 건 돌아올 메아리가 아닐지도 몰라요 그건 열매들이 익어가는 소리이거나 팽창하는 하늘의 속삭임일지도 몰라요 갈대가 맨발로 웅숭그린 강가에서 당신을 떠나 보내고 물수제비를 뜨며 단발간격으로 수면 흔들어 놓는 납작 돌멩이의 몸부림이 낯설지 않은데요 당신의 말대로라면 저 돌멩이의 마지막 흔적이 바닥을 울리는 순간 찡한 뜨거움으로 녹아 흐르겠지요

2
맨 처음 당신을 찾아 나섰던 그 자리 거기 나는 꼼짝없이 발묶여 있는데요 깊게 흐를수록 멀어지는 당신을, 아득한 바닥에서 푸른 피 흘리며 나는 다슬기처럼 시큼해지는데요 뜨겁다니요 시리디시린 혈관 껴안아 주는 건 피붙이같이 뿌리 얽힌 갈대 뿐이었어요

3
어쩌면 물구덩인 듯 보여요 깊어지라 한 마디를 水深만큼 던지고 뗏목 따라 떠난 당신을 돌아올 거라 손꼽는 망부석 하나가. 어쩌면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먼 나루 하나 남겨 놓고 떠났는데요 혹 돌아올지도 모르지요 수증기나 구름 혹은 비가 되어 당신이 깊게 박아놓은 혈관의 뿌리를 뜨겁게 헹궈주리라 믿는데요


◈전북일보
왕오천축국전<장창영>

지금도 무릎이 시큰거리느냐
천 삼백 년이면 불심 강한 이도 한 수 접고 가는 길
어쩌면 너도 천축(天竺)서 관절 꺾고
절 마당 목욕탕인냥 푸욱 담그고 싶었겠지
북녘땅 접어들 때엔 미처 예측 못했겠지
살아 있는 부처 만나기 위해 떠났던 기약 없는 길이었기에
다들 흑백사진 속 표정 없는 얼굴과
써금써금 해진 활자 이야기로만 기억하지만
너만은 또렷이 알고 있지
총령(蔥嶺) 거쳐 오대산 한 달음에 달려오던 발길이
꼬이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지
중국 공안에 쫓기던 어린 눈동자
고향이 함흥이랬지
단속 피해 신발만 챙겨든 채
훈춘 화룡 거치면서 몸은 숨 죽이는 일에
더 빨리 익숙해졌다지
장춘행 기차에서
매운 기침으로 쏟아지며 안겼을 때
네 몸은 후끈 달아올랐다지
부처님 진신사리 접했을 때보다
예정에 없던 일이라 변변히 옷가지도 못 챙기고
도문 국경* 저편에서 물끄러미
강 이쪽으로 씁쓸히 시선만 던지던 아우여!
돌아오지 않는 다리 안으로
성큼, 건너 설 때는 언제인가
이 땅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것은
부처 때문인가, 꽃제비 때문인가
그도 아니면 무심한 우리 때문인가
오늘도 목숨을 승인 받기 위해
연변, 길림, 용정으로 떠돌면서 오들오들 떨고 있는
혜초, 내 어린 아우여!

* 북한과 중국의 국경 사이에 있는 다리로 이 다리를 통해 경제와 인적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진다.


◈전남일보
함평 병어젓<박옥영>

1
이 새 저 새 해도 먹새가 으뜸이라
고흥 진석화
낙월도 백하 영암 모치젓
강진 꼴두기 함평 병어젓
푸욱푹 삭아
짭짤하게 간이 들어도
바다를 끼고 사는 제 어미 품속에 자라서
입맛이 다 다른 법이라

2
오늘이 벌써 칠일이니
설장이 서겠네
한창 병어젓, 엽삭젓 맛이 들겠네
칼칼한 겨울비 내리는 장터
해 지기 전부터 장작불 지필 것이네
평생 보따리 챙겨들고 살아
더러 모나고 휘어졌지만 억척스레 살아남은 얼굴들
온 나절 선짓국 설설 끓다
병어젓 한 쪽지에 간 맞추며
훌훌 막걸리 들이켜 불을 쬘 것이네
파장한 시장 모퉁이
구구절절 마지막까지 지키고 서서
수더분한 손매로 몇 십 번 손을 잡았을
온갖 자식자랑 늘어놓는 목숨들
아, 설 대목 바쁜 틈에도
짭짤한 겨울비 내리고
장바닥 여기저기 퍼 놓은 장국냄새
아직 그리움 버리지 않았을 게고
오랜 근심에 삭아 골골한 할머니 무릎 앞
비좁은 틈새로 꾸역꾸역 파고들어와
갖은 흥정에도 저렇듯 넉살좋은 병어새끼들
아직 싱싱하니 설 밑천이 되겠네
철퍼덕 앉은 병어 몇 마리
인사성 밝은 뉘 집 새끼 만나자
도톰한 손바닥들 탁탁 치며
금방이라도 팔딱 뛰어오를 듯 뛰어오를 듯

3
비 오는 함평장터
입심 좋게 타던 장작은
삭아들수록 옹골찬 불담이 되고 함평 병어젓은
뼈마디 살점 하나 하나
푸욱푹 삭아야 제 맛이지
겨울엔 더러 비가 내려야 제 맛이지


◈평화신문 - 당선작 없음

◈한라일보
섬강에서<장시우>

열리지 않는 섬
꽃망울을 피어 올린 몸짓은 힘겹다
눈뜨지 못할 아침이 찾아와
나무를 흔들어 깨우고
햇귀는 그늘을 지운다
그가 손을 내밀었을 때
풀꽃은 잠시 흔들렸다
가슴깊이 물이스며
들숨 날숨이 뒤섞인 섬강은
뿌리 속으로 물이 들었다
물떼새 날갯짓 따라 흐른다
눈감으면 발목에 감기는 강물소리
그는 울음을 강바닥에 묻었다
그가 내 손을 잡았을 때
나는 달맞이꽃과 같아서
그에게 가서 입을 맞춘다
풋잠처럼 씨앗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