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신춘문예 당선작
◈동아일보 - 당선작 없음
◈조선일보
옥편에서‘미꾸라지 추(鰍)’자 찾기<천수호>
도랑을 한
번 쭉 훑어보면 알 수 있다
어떤 놈이 살고 있는지
흙탕물로 곤두박질치는 鰍
그 꼬리를 기억하며 網을 갖다댄다
다리를 휘이휘이 감아오는
물풀 같은 글자들
송사리 추, 잉어 추, 쏘가리 추
발끝으로 조근조근 밟아 내리면
잘못 걸려드는
올챙이 거머리 작은 돌맹이들
어차피 속뜻 모르는 놈 찾는 일이다
온 도랑 술렁인 뒤 건져올린
비린내 묻은 秋는 가랑잎처럼 떨구고
비슷한 꼬리의 (송사리)추, (잉어)추, (쏘가리)추만
자꾸 잡아 올린다.
(편집자주:송사리추, 잉어추, 쏘가리추는 원래 한문 글자로 표기해야 하나 컴퓨터 한자의 제한으로 한글로 대치했습니다.)
◈한국일보
삐비꽃이 아주 피기 전에<김일영>
햇빛들이 깨어져 모래알이 되고
조개들은
그 빛의 알갱이로 집을 지어
파도에 마음을 실어 보냈다가
다시 불러들이던 섬
밥 묵어라
어둠이 석양 옷자락 뒤에
숨어
죄송하게 찾아오는 시간,
슬쩍 따라온 별이
가장 넓은 밤하늘을 배불리 빛내던
달빛 계곡 꿈을 꾸면
쪽배가 저보다 큰 텔레비전을 싣고
울 아버지 하얗게 빛나는 이빨을 앞장세워 돌아오듯
이제 다친 길을 어루만지며 그만 돌아와
삐비꽃이 아주 피기 전에
여린 삐비꽃을 씹으며
애들 소리 사라진 언덕에 앉아 있으면 석양은
머리가 하얀 사람들이
애벌레처럼 담긴 마당에 관절염의 다리를 쉬다 가고
빌려서 산 황소가 다리를 꺾으며
녹슨 경운기 쉬고 있는 묵전을 쳐다 보는
섬으로
늙은 바람이 낡은 집들을 어루만져주는 고향
그대가 파도소리에 안겨 젖을 빨던
그 작은 섬으로
*묵전:
묵혀두어 잡초가 무성한 밭
◈대한매일
꽃피는 공중전화<김병곤>
퇴근한 여공들 다닥다닥 세워
둔
차디찬 자전거 열쇠 풀고 있다
창 밖으로 흰쌀 같은 함박눈이 내리면
야근 중인 가발 공장 여공들은
틈만 나면
담을 뛰어넘어 공중전화로 달려간다
수첩 속 눈송이 하나씩 꾹꾹 누른다
치열齒列이 고르지 못한 이빨일수록 환하게 출렁이고
조립식 벽 틈으로 스며 들어온 바람
흐린 백열등 속에도 눈은 수북이 쌓인다
오래 된 번호의 순들을 툭툭 털어
수화기에 언 귀를 바짝 갖다 대면
손톱처럼 앗! 하고 잘려 나 갔던 첫사랑이며
서랍 속 손수건에 싸둔 어머니의 보청기까지
수화기를 타고 전해 오는 또박또박한 신호음
가슴에 고스란히 박혀 들어온다
작업반장 장씨가 챙챙 골목마다 체인 소리를
피워 놓고 사라지면 여공들은 흰 면 장갑 벗는다
시린 손끝에 보푸라기 일어나 있다
상처가 지나간 자리마다 뿌리내린 실밥들
삐뚤삐뚤하다
졸린 눈빛이 심다만 수북한 머리칼 위로 뿌옇다
밤새도록 미싱 아래서 가위, 바위, 보
순서를 정한 통화 한
송이씩 피었다 진다
라디오의 잡음이 싱싱하다
◈경향신문
귀로 듣는 눈<문성해>
눈이
온다
시장 좌판 위 오래된 천막처럼 축 내려 앉은 하늘
허드레 눈이 시장 사람들처럼 왁자하게 온다
쳐내도 쳐내도 달려드는
무리들에 섞여
질긴 몸뚱이 하나 혀처럼 옷에 달라붙는다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하고 실밥을 따라 떨어진다
그것은 눈송이 하나가
내게 하고 싶은 말
길바닥에 하고 싶은 말들이 흥건하다
행인 하나 쿵, 하고 미끄러진다
일어선 그가 다시 귀 기울이는
자세로 걸어간다
소나무 위에 얹혀 있던 커다란 말씀 하나가
철퍼덕, 길바닥에 떨어진다
뒤돌아보는 개의 눈빛이
무언가
읽었다는 듯 한참 깊어 있다
개털 위에도 나무에도 지붕에도 하얀 이야기들이 쌓여있다
까만 머리통의 사람들만 그것을 털어내느라
분주하다
길바닥에 흥건하게 버려진 말들이
시커멓게 뭉개져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다
그것이 다시 오기까지 우리는 얼마를 더
그리워해야 하나
◈세계일보
신발論<마경덕>
2002년 8월 10일
묵은
신발을 한 보따리 내다 버렸다.
일기를 쓰다 문득, 내가 신발을 버린 것이 아니라 신발이 나를 버렸다는 생각을 한다.
학교와 병원으로 은행과 시장으로 화장실로, 신발은 맘먹은 대로 나를 끌고 다녔다.
어디 한번이라도 막막한 세상을 맨발로 건넌 적이 있는가.
어쩌면 나를 싣고 파도를 넘어 온 한 척의 배.
과적(過積)으로 선체가 기울어버린. 선주(船主)인 나는 짐이었으므로,
일기장에 다시 쓴다.
짐을 부려놓고
먼 바다로 배들이 떠나갔다.
◈문화일보
징검돌이 별자리처럼 빛날때<김병호>
금줄 친 대문이
어둠을 낳습니다
대문에서 토방으로
토방에서 사랑방으로 이어진
징검돌이 별자리처럼 빛납니다
환하고 평평한 징검돌 안에
담긴
어린 내가 별을 닮아가는 밤
할아버지는, 저녁보다 먼 길을 나섭니다
눈 깊어 황소 같던 할아버지
할머니를 맞던 해 봄날
강가의 둥글고 고운 돌만 골라
새색시 작은 걸음에도 마치맞게
자리 앉혔다는 징검돌
그
돌들이 오늘밤
별똥별 지는 소리로 울고 있습니다
별똥별 하나, 하늘을 가르자
어미 소의 울음소리가 금줄을 흔듭니다
미처 눈 못 뜬 송아지가 뒤척이자
어미 소가 송아지를 핥아줍니다
내 볼이 덩달아 따뜻해집니다
하늘은 오래 된
청동거울처럼 깊습니다
바람은 저녁을 다듬어
첫 별 뜨는 곳으로 기울고
내가 앉은 징검돌들이
지워진 별자리를 찾아
오릅니다
삼칠일도 안된 송아지의 순한 잠을
이제 할아버지가 대신 주무십니다
◈매일신문
낙타<김옥숙>
낙타의 젖은 눈썹을 본 일이 있는가 그림 속 낙타의 눈을 들여다보지 말라
낙타의 길고
아름다운 눈썹에 손을 대지 말라
천년만년 그림 속에 박제가 되어있어야 할
낙타가 고개를 돌려 당신 앞으로 걸어나올 것이다
낙타가 당신에게 올라타라고 말을 건넨다
언젠가 낙타의 등에 올라타고
한없이 사막을 건너갔던 것처럼 낙타의 익숙한 등
불룩한 혹을 쓰다듬을 것이다 당신은
지쳐보이는 식구처럼 낙타가 안쓰러울 것이다
선인장들은 하늘에다 무수한 가시를 박아 넣고
메마른 하늘을 마구 찔러대고 있다
선인장의 눈과 귀는 뿌리에 있지 낙타가 말한다
캄캄한 지하에 눈과 귀를 박아 넣고
수만 미터 아래에서 물이 흐르는 소리를 찾아내는 거야
내 몸 속의 물을 꺼내 마셔, 괜찮아
낙타의 목을 끌어안고 우는 당신
낙타의 몸에서 물을 꺼내 마신다
모래바람이 불어와 낙타의 몸을 이불처럼 덮는다
당신은 눈물을 훔치며 그림 속을 걸어나온다
당신의 몸 속에 들어온 낙타 한 마리
문을 열면 모래 바람이 거세게 불고
당신의 늑골 속으로 기억 속으로 모래가 쌓이는
소리
당신은 몸 속의 낙타 한 마리 거느리고
사막을 건넌다 그림 속의 낙타는 눈썹이 길다
◈부산일보
돌 속의 길이 환하다<신정민>
밤새 내린 눈을 모포처럼 둘러 쓴 길이
꽁꽁 얼어붙은 강을 건너고 있다
눈길 위로 걸어간 발자국
먼저 간 발자국 위를 다시 걸어
뒤엉킨 길이 또 하나 걸어가고 있다
강둑에서 멈춘 발걸음들
문득 발자국의 임자가 궁금하다
강 건너에 도착한 풍경들
마주보고 서 있다가
발이 시릴 때쯤 안다
멀리 있는
하늘이 제일 먼저
이 길을 건넜으리라
그 아래 몰골 드러낸 산이 건넜을 테고
그 다음엔 산등성이의 그림자가
이 길을
건넜을 것이다
털갈이하는 짐승처럼 서있는 나무들도
눈길 위에 발자국을 남겼으리라
건너온 길을 바라보며
제 발자국
헤아리지 않으며
얼어있는 강 밑으로 흐르는 물소리
묵묵히 듣고 있는 것이다
건너지 않고 서있는 나를
아무 말 없이
기다리는 풍경
강 건너 저쪽으로 걸어 들어간다
누군가의 발자국을 지우며 간다
◈강원일보
섬강에서<장시우>
열리지 않는 섬
꽃망울을 피어 올린 몸짓은 힘겹다
눈뜨지 못할 아침이 찾아와
나무를 흔들어 깨우고
햇귀는 그늘을 지운다
그가 손을 내밀었을 때
풀꽃은 잠시 흔들렸다
가슴깊이 물이스며
들숨 날숨이 뒤섞인 섬강은
뿌리 속으로 물이 들었다
물떼새 날갯짓 따라 흐른다
눈감으면 발목에 감기는 강물소리
그는 울음을 강바닥에 묻었다
그가 내 손을 잡았을 때
나는 달맞이꽃과 같아서
그에게 가서 입을 맞춘다
풋잠처럼 씨앗처럼.
◈경남신문
동전위의 탑<이영자>
달동네 언덕바지 구멍가게에서
LG25시 편의점까지
떡볶기집 지나 맥도널드 빠리바케트 건너 뛰고 붕어빵집까지
딸아이는 떼굴떼굴 굴러다니는 중입니다
자, 지금
어디론가 내처 달리는 당신 호주머니 속의 짤랑거림
그것은 동전마다 아름아름 굴리고 온 바퀴들의 볼멘
혓바닥
바퀴 사이로 휘감겼던 눈빛들이
뜨겁게 조였다 헐거워지는 소리 잠겨 있지요
울퉁불퉁 바퀴가 되기 전
한
잎의 해였고 한 잎의 달이었고
해와 달이 구름에게 먹힌 날의 막 구워낸 한 입 빵이었던
동전의 길
빵을 사먹을까?
돼지저금통에 넣을까?
고민에 빠진 딸아이와 뜨거운 이마 맞대고
자, 이제 날아올라 볼까요
까마득히
어머니
먹지 않고 입지 않고 쌓아올린 동전 위의 탑까지
팔랑팔랑
날아올라 가만히 손바닥 펴면
매질처럼 따가운 햇살의 가지
위로 벙긋벙긋 피어오른
딸아이 얼굴 한 잎 붕어빵 한 입
눈앞이 아찔합니다
더 이상 굴러 떨어질 바닥이 보이지 않는
곳입니다
◈경인일보
타관에서<박세인>
몇 번이고 물어서 갔다
저물 무렵 차는 늦게
도착했다
강원도 옥수수 술을 마셨다
잎새 우수수 떨구는 바람, 삭풍인갑다
무너진 탄촌 바라보며 저문 강물소리 들었다
여행지에서 아무 생각없이 무작정 걸었다
그 생각의 끝에 늘 두고온 사람들 있었다
추억은 잊어버리려해서 잊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무진장 쏟아지는 저 청천 하늘
별 속에도 그 사람 있었다
토방에서 중늙은이 몇 화투를 치고
나는 낮게
엎드려
두고 온 도시와 지난 생을 생각하였다
세상이 받아주지 않으면
가끔 사랑하는 것이 죄가 된다
검은 밤이 길고
길었다
강물 거센 물살 소리, 잠이 오지 않았다
허름한 여관 벽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그래도 삶이란 살아 볼만한
것이다'
그곳을 나올 때 한 번 더 보았다
◈광주일보
무인도<정동현>
짙은 물빛
가까운 저녁엔 단 한번도 만나본 적 없는 누이들의 냄새가 그리워진다 겨드랑이 쉰내가 조개처럼 따닥따닥 매달려 유난히 북적이는 퇴근 시간- 나는
오랜 추억의 크기만큼 좁은 섬으로 흘러 들어간다 이 사람 저 사람 할 것 없이 마을 버스 속으로 꾸역꾸역 몰려들 듯 물결에 쓸려 고래 뱃속으로
가라앉는다 고깃집 붉은 빛과 싸이키 조명 탐조등이 능숙하게 훑고 지나가는 곳마다 파도가 일렁이고 산호초 춤추는 아로마 나이트크럽 아니 아로마
노스탤지아 나이트크럽 그게 그곳의 본래 이름일게다
우리 동네 마을버스 1-2번 로얄빌딩 바이더웨이 광덕슈퍼 목이동 파출소 지나 강서
보건소에서 노선은 끝난다 늘 그렇듯 구토와 주정과 욕설로 끝나는 나이트크럽 무인도보다도 외따로 떨어진 종점 버스- 춤추던 산호초들은 어디 있을까
파도소리도 없이 적막한데 빈 손잡이처럼 흔들리는 밤의 끝 한 누이가 내게 다가와 고단한 별들의 눈썹이 새겨진 전단지 하나 건네준다.
◈국제신문
두실역 일번 출입구<최정란>
퇴근길, 지하도 계단을 올라서면
맥도날드
불빛을 등지고 일 톤 트럭 한 대가
가파른 작은 불빛을 밝히고 있다
그 불빛 아래 손짓으로만 말하는 두 사람
이마에 맺힌
근심을 닦으며 말을 굽는다
말과 말 사이, 사이
숨을 고르는 손으로
꽃 모양 틀에 묽게 풀린 소리의 반죽을 붓고
그
위에 잘 발효된 침묵을 한 줌 얹자
설익은 말들이 숨을 죽이고 돌아눕는다
반죽 묻은 손으로 간을 맞추고
삐걱거리는 관절의
안부를 묻는 동안
젖은 말들 불의 온기를 들이마시고
완숙의 음절로 한껏 부풀어올라
두꺼워지는 어둠을 몇 걸음 뒤로 밀어낸다
종이봉지 안에서는
단골이라고 한 마디 더 얹어준 덤의 말
속에 든 말없음표까지 골고루 뜸이 들고
보드랍게 말랑거리는
말을 받아든
나는 목에 걸린 고등어 가시 같은 누추한 설움에
목 메인 일상을 천천히 목으로 넘기며
무성한 차가운 말들이
파놓은
캄캄한 지하도 같은 숨은 함정들을 용서한다
오늘도 두실역 일 번 출입구 농아 부부
소리 없이 따뜻한 느낌표 같은
붕어빵을 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