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춘문예 詩당선작] 시월의 잠수함
김지훈
구름이 입술 위에 달라붙는
이 자리는 북한산 어디쯤일까. 지닌 것 없이
숲만 가득 담아둔 나무
그늘에 앉아
기어이 가져온 새 책에 손가락을 베고 말았다
혈이 탁 트이고서야 내 온몸이 잠망경으로 솟아오를 수
있었다
작은 물줄기 속에서도 잘 돌아가는 스크루
사방 가득한 수억 燭의 소리가 큰 닻이 되어
산봉우리들이
신들의 전함으로 불리었던 그 바다 위에 박혀 있다
밤낮이 한꺼번에 몰아오는 내연기관의 큰 울림
그 안에는 칼 대신
나뭇잎 들고 싸우던 날도 있다
힘줄 선명한 잎 하나가 공기를 잘게 저미며 내려온다
신들은 어디에서 배를 만드는
중일까
베어낸 나무 밑동에 그려진 선명한 음파탐지기 자국
나는 녹슨 쇠를 털며 가라앉고 있는 배들의 그림자를
본다
나뭇잎을 칼처럼 쥐고 싸우던 시절
앙상해진 주물기계들이 나뭇가지에 붙어 있다
바람이 떠미는 결이 물
속인 줄 알고
낙엽이 벗었다가 도로 신는 잠수화를 본다
아직도 능선에는 사나운 기운이 넘친다
신들의 칼을
나는 나뭇잎이라고 고쳐 부르고 싶다
이 배를 붙들며 한 자리에서 먼바다를 돌아오는 사계절
내 고함으로 한 방의 어뢰를
뭉쳐
사령관의 함교가 있는 백운대를 한 방 때릴 셈이다
갑판이 낙엽을 털 듯 몸을 털며 다시금 방향을 잡고 나아갈
때
수리공들이 큰배를 향해 떼지어 몰려가는 항로를 따라
푸른 위장을 한 잠수함이 쫓아오는 소리가 들린다
[심사평] “역동적 시어들 호방한 기운 넘쳐”
지난 해와 비교해 볼 때 전체적인 응모작의 수준은 높은 것이
아니었다. 눈을 끄는 빼어난 작품이 쉽게 눈에 띄지 않았던 것도 아쉬운 일이다. 물론 새로운 신인의 등장이 그리 흔치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심사를 할 때는 기대가 있기 마련이다. 신춘문예는 하나의 등용문(登龍門)이다. 용문을 오를 때에는 벼락이 치고 꼬리 그을린 큰 잉어가
용이 된다고 하지 않던가. 우리는 걸출한 신인의 출현을 보고 싶다.
본심으로 넘어온 15명의 응모작 중에서 마지막까지 논의된 것은 두 사람의 작품이었다. 그중에서 한 응모자의 작품이 중복 투고로 인해
결선에서 탈락되었다는 사실을 밝혀둔다. 앞으로도 응모의 원칙은 엄격하게 지켜질 것이다.
당선작으로 결정한 김지훈의 ‘시월의 잠수함’은 스케일이 크고 힘이 있는 작품이다. ‘구름이 입술위에 달라붙는/ 이 자리는 북한산…’으로
시작되는 이 시의 역동성은 현실과 상상, 내면과 외면, 하강과 상승 같은 쌍대(雙對)의 문법을 잘 활용하는 데서 온다고 말할 수 있다. ‘혈이
탁 트이고서야 내 온몸이 잠망경으로 솟아오를 수 있었다’, ‘능선에는 사나운 기운이 넘친다’, ‘백운대를 한 방 때릴 셈이다’ 같은 시행에서
보듯이 호방한 기운도 느껴진다. 그러나 말의 느낌이 큰 시어들을 선택하고 장중한 이미지들을 배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노력이 계곡처럼 깊은 울림을
품은 한 편 시의 웅장함으로 형상화되지는 않은 듯했다. 남다른 정진으로 꾸준한 향상의 길을 가기를 바라면서 당선자에게 축하의 말을
전한다.
시인 황동규·최승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