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의香氣

옥수수밭이 있던자리

湖月, 2005. 10. 22. 21:20

 

수수밭이 있던 자리

 

 

                                                     나희덕


텅 비어 있다                                       
어제까지 열려있던 문이 닫혀있다
바람에 소리를 내던 옥수수밭이 사라져버렸다
옥수수가 사라지면서
흔들림도, 허공도 함께 베어졌다
허공은 달빛을 안을 수 있는 팔들을 잃었다
소리내어 울 수 있는 입술들을 잃었다
갑옷과 투구 부딪치는 소리,
석탄을 지닌 산줄기가 먼저 폐허가 되듯이
열매가 실한 순서대로 베어져 나갔다
밑둥에는 아직 피가 마르지 않았다
드문드문 남아있는 옥수숫대,
형기가 유예된 수인처럼
한 종족이 거기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을 뿐.
밭은 더 어두워질 것이고
성근 열매들은 여분의 삶을 익혀 갈 것이다
희고 붉고 검은 옥수수알들이 익어갈 것이다
수확한 옥수수를 자루에 넣는 손들.
피 흘리는 허공도 함께
푸른 자루를 실은 트럭이 산모퉁이를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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