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표작 153

이어도는 알고 있다 / 안행덕

벽조목과 명장 / 호월안행덕​ ​벽조목과 명장의 한판 씨름이 시작된다숨 막히는 순간이다​벼락을 맞고 저승을 다녀온 대추나무이미 사리가 되어 칼끝을 저항하고시치미 딱 떼고 어깃장을 놓으며장인의 손을 희롱한다​번갯불에 덴 아픈 상처를 어루만지는 그는수술대에 누운 아기를 다루듯조심조심 혼신魂神을 다하는 정성에벽조목도 순해지는데​어려운 수술 끝에 행운의 길을 여는 순간조각칼을 쥔 명장의 손이 찌릿하다지뢰의 뇌관을 건드린 듯 등줄기에 진땀이 난다 ​이어도는 알고 있다 / 호월안행덕​아직도 무간지옥을 방황하는 너이어도 이어도 끝 간데없는세월의 실타래 풀어 놓고실마리를 찾지 못하네​ 망망 바다 밑에 뿌리를 내린 암초 ​청춘 바친 어부들 영혼을 부여안고울음 곳간 열어놓고해녀들 곡소리를 저장하고 있구나 ​노구로 파도 ..

발표작 2025.02.17

파도에 젖은 마음 / 안행덕

파도에 젖은 마음 / 안행덕 천지간에 홀로인 듯 외로운 마음 바다를 배경으로 멍하니 서 있다  취한 듯 비틀거리는 하얀 파도는 수많은 언어로 백사장에 얼룩진 추억을 차르르 차르르, 지우고 있다  전설 속으로 사라지는 제 그림자가 아쉬운 듯 다시 뒷걸음질치며 절룩거리는 파도를 보고 아픔을 베고 누웠던 성근 모래알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달랜다  성한 것이 있으면 멸하는 것도 있을 터 노(怒)하지 마라 노(怒)하지 마라 울음이 들어 있는 젖은 바다를 달랜다  A Heart Wet by the Wave /AN HAENGDUK Such a lonely heart, all alone in the whole worldstands against the sea vacantlyA white wave, stagger..

발표작 2024.12.08

달빛과 거미 / 안행덕

달빛과 거미  / 안행덕 열이레 달빛이 처마 밑 어둠을 밀어낸다 어둠에 익숙한 거미 한 마리 조심스러운 사냥을 꿈꾼다 조심조심 묶어둔 거미줄에 걸린 환한 달빛 살아서 퍼덕거린다 한번 걸린 먹이는 놓아 줄 수 없다는 듯 예리한 발톱으로 줄을 당긴다 출렁, 외줄을 타는 광대처럼 날렵하다 풍경도 없이 사라지는 척 바람에 흔들리는 달빛을 슬쩍 바람 사이에 가볍게 옭아맨다 그렁그렁한 슬픔 하나 어둠에 매달아 놓고 보이지 않는 덫으로 달빛을 유혹한다.   The Moonlight and a Spider / AN HAENGDUK The moonlight on the 12th of Decemberpushes the darkness under the eavesA spider familiar with that darkne..

발표작 2024.12.08

산사의 여인 / 안행덕

산사의 여인 / 안행덕 산사의 아침 햇살 너무 맑아 속세의 쌓이고 쌓인 검은 속 탁 털어 말리고 싶다  파란 하늘이 푸른 물인 양 처마 끝 단청을 유영하던 물고기 지느러미 한가롭게 흔들린다  부처도 모르고 불자도 아니면서 법당을 기웃거리는 속절없는 여인 귓전에 수런거림이 두렵다  저 혼자 흘러들어온 부질없는 욕심 목탁 소리에 마음의 빗장을 열고 누수가 되어 소리 없이 흘러가는데  부처를 닮으려는 순한 마음 눈물 마르기 전에 순해진 저 처마 끝 물고기를 닮아야지  A Woman at a Mountain Temple /AN HAENGDUK The sunlight at the mountain temple is so clean thatI'd like to shake off and dry my dark heart..

발표작 2024.12.08

범어사에서 / 湖月安幸德

범어사에서 / 湖月 安幸德 ​​ 범어(梵漁)가 놀았다는 전설을 찾아물처럼 바람처럼 길을 나섰네바람결에 묻어나는 풍경소리은은한 산문에 들어서니몇 백 년 된 은행나무 소나무행자처럼 읍소하며 나를 반기네​​일주문 지나 사천문에 이르니세속의 짐은 다 벗어 놓고 왔느냐눈 부릅뜬 사천왕 호령에오금 저리며불이문 보제루를 돌아서니빛바랜 단청을 인 대웅전부처를 품어 안고자비로운 아미타의 미소가 환하다​​돌계단 하나에 세속의 연 하나 내려놓고또 한 계단 오르며 욕심 하나 버리니빈마음에 고요를 담아 슬며시 여민 옷깃두 손 모아 삼 천 배(拜)로 세속을 벗어버리니절 마당이 출렁거리고 범어(梵漁)가 놀고 있네​ ​ 시집『바람의 그림자』에서​​

발표작 2024.11.22

달빛을 등에지고 / 안행덕

​ 달빛을 등에 지고 / 호월안행덕  이산 저 산 산유화 봉긋한 입술이 환하게 벙그는 4월 어느 날  몇 달째 말문 닫은 우리 어머니더는 못 참겠다는 듯 손을 흔들어 수신호를 하시더니 어둑어둑 해거름에 마실 나가시듯집을 나서시네.흰나비 날개처럼 소리도 없이 가시네 오매불망 저승길도 따라가겠다고보채는 눈물은 본체만체하시네 한 번도 가본 일 없는 머나먼 길을환하게 달빛을 등에 지고 꽃길을 걷는 듯 마실 가시듯 가시네흰나비 꽃밭을 찾아가듯 훨훨 날아가시네  ​달빛을 등에 지고 2 /  호월안행덕​어야디야가자가자 어서 가자내가 생겨나 난 곳 本鄕으로 가자한 세상, 어야디야 잘 살았다돌아보니 머나먼 길꽃길도 가시밭길도내가 감당할 만큼 주셨구나 어야디야 가자가자 어서 가자괴나리봇짐 대신 달빛을 등에 지고 내 가는..

발표작 2024.10.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