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作 287

능소화

능소화 / 안행덕 세월이 약이라니요 날이 가면 갈수록 쌓이는 이 그리움을 어쩌라 구요 행여 임의 발걸음 소리인가 나팔처럼 커지는 내 귓바퀴를 보세요 애타게 담장에 매달려 키를 늘리는 안타까운 내 심정을 아시나요. 오늘도 붉게 피어나는 아픈 속내 감추지 못하고 줄기마다 새긴 사랑 헛되었어라 매정한 정 돌아보지 말자고 마디마디 새겨 두었건만 열꽃 같은 붉은 멍울 지우지 못하고 옛 정(情 )에 매달려 아직도 눈물 가득하여라 시집 『꿈꾸는 의자』에서

詩 作 2022.07.03

화전 풍경

화전 풍경(火田 風景) / 안행덕 ​ ​병풍처럼 둘러선 태백산맥 끝자락 천둥과 비바람 백 년을 흔들어도 빛바랜 사진첩인양 하얀 구름모자 삐딱하게 쓰고 낡은 집 한 채 핼쑥한 낯빛으로 누구를 기다린다 촘촘한 너와(瓦) 목(木) 사이마다 비릿한 생선 비늘 같은 너와 지붕 푸른 이끼로 세월을 새겨 넣고 허기진 가난과 고난의 이력을 역사처럼 펼쳐놓은 회색빛 풍경 풀잎 스쳐 간 벌레들 울음소리 물 한 방울 흘러간 흔적까지 선명하다 짓궂은 바람의 어릿광대에, 반쯤 열린 문짝 추억처럼 묶어둔 역사 한 페이지 시큰거리고 덜컹거리는 무릎으로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듯 기우뚱 엉거주춤 너와집 한 채 쓰러질듯 서있다 주인이 드나들던 문틈으로 보랏빛 엉겅퀴꽃 한 발을 들여 민다 도인촌(道人村)에서/ 안행덕 지리산 청학동 삼성궁에..

詩 作 2022.06.15

문경 새재에서

문경 새재에서 / 안행덕 과거보러 가는 길 한양 가는 길 괴나리봇짐에 짚신 매달고 선비가 걷던 옛길 새들도 울고 바람도 구름도 울었다는 고개 바람 따라 구름 따라 나도 한번 가보고 싶었네 고개마다 구릉마다 쌓인 사연 얼마인가 주흘산, 조령산의 긴 탄식과 한숨 하얀 폭포가 되고 푸른 계곡이 되었나 벼랑에 매달린 야윈 저 소나무 몰아치는 눈바람 비바람에 제 살 내어주고 기기묘묘 해진 손가락 바위를 잡고 천 년을 버티었구나 굽이마다 떠돌던 전설, 하늘에 흰 구름 되어 호수에 제 그림자 드리우고 내려다볼 뿐 새재鳥嶺가 된 사연 구구절절 아직도 다 풀어 놓지 못하는가 나 여기 옛길에서 한 잎 풀잎 되어 바람 따라 구름 따라 흘러가는 옛날을 만나네 시집『비 내리는 江』에서

詩 作 2022.04.29

삼월 삼 짇 날

삼월 삼짇날 / 안행덕 _ 장 담그는 날 _ 봄바람 살랑 꼬리 흔드는 삼짇날 옹기종기 장독대 웃음소리 환하네 툭 하면 못생긴 메주라고 놀리는데 그게 어디 네 죄 이더냐 죄 없이 서러운 은둔의 몇 달 한숨을 괴춤에 찔러 넣고 돌아 앉은 골방 살이 겨울밤 창호지에 비치는 달빛도 서러워라 메마른 가슴 더 독해지기 전 진한 맛으로 누구를 유혹하라고 야시같은 봄바람 너를 흔들었구나 숯검정과 홍紅고추로 곱게 단장을 했네 오글오글 봄볕이 스며드는 항아리 잡귀도 얼씬 못하게 금줄을 치고 종이 버선 오려서 거꾸로 붙여 놓고 몸 풀 날 기다리는 새댁같이 *새칩다 시집 『숲과 바람과 詩』에서

詩 作 2022.04.03

생명 / 호월 안행덕

생명 / 호월 안행덕 종지처럼 작은 둥지에 새알 하나 두고 숲 가꾸기 예취기의 소음에 놀란 어미 새 숨 막혀 오는 공포감 옴짝달싹 못 하네 우거진 덤불 말끔히 이발하듯 베어낸 자리 은신처 들켜버려 겁먹은 어미 잃은 새알 어미 새 저만치 숨어 콩닥 이는 새 가슴 저 작은 생명 어쩌나 놀라고 기막혀도 문서 한 장 없는 저 둥지 누가 지켜줄까 억장이 무너져 내려 작은 발만 동동 거리네 시조집 『노을빛 속으로』에서

詩 作 2021.1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