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루발 / 안행덕
먼 하늘 그리워 울음 삼킨 숲
잎마다 푸른 그늘이 내려앉은 그곳
어둠을 빠져나온 여린 노루발 꽃송이
전설을 방울방울 피워내고 있다
은혜를 아는 노루는
산에만 발자국을 찍는 게 아니었구나
금세 무너질 것 같은 옹색한 달셋방
달빛을 콩콩 찍고 가는 발자국도 있다
매일같이 낯선 길을 돌고 도는
수선 집 재봉틀에 달린 노루발
허기진 발로 밥 한 공기 찾아
지구를 몇 바퀴나 돌았을까
구닥다리 낡은 세월 뒤집어가며
이웃의 서러움도 꾹꾹 밟아 기워내는 발
툭툭 뜯어진 옷깃, 털어내는 발톱 끝에
싸라기처럼 묻어나는 실밥을 먹고
야윈 발가락이 절룩거릴 때마다
덧대고 이어주면 드디어 빛나는 진실
오늘도 생의 늑골 밑을 환하게 비춘다
쑥 같은 그녀 / 안행덕
아지랑이 춤추던 자리에
봄볕이 기웃거릴 때
잔설 비집고 아무데서나
쑥쑥 나오는 저 쑥 좀 봐
가녀리고 보드라운 저 몸집 어디에
혹한을 참아내는 깡단을 숨겨두었을꼬
서럽고 차가운 냉대 온몸으로 견디고
아무데서나 히죽 웃는 서산댁은
아마도 전생이 쑥이었나 봐
하얀 앞치마에 탁배기 세례를 받아도
뽀얀 얼굴이 멍들어 푸르뎅뎅한 쑥색이 되어도
아롱아롱 걸어들어올 자식을 기다리며
쑥 범벅처럼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여자
은은하고 쌉싸름한 쑥 차 같은 여자
조개무덤 / 안행덕
주인을 잃어버린 빈집
누가 이렇게 무덤처럼 쌓아 놓았나
산처럼 모여 있어도 외로운가
가슴 열어 놓고 먼 산 바라기를 하네
세상에
뼈를 깎아 세운 아름다운 집
이렇게 고운 집에는 누가 살았을까
어느 누가 보쌈을 해갔는지 흔적도 없네
대문도 없는 빈집에 죽은 조개를 찾아온
바다를 건너온 바람이 조문하고
애도 곡 같은 파도 소리 따라
물새들 울음은 곡哭소리처럼 서럽네
애장터에서 우는 새끼 잃은 어미 같네
바람둥이 파도는 쉬지 않고
주인 없는 빈집을 슬쩍슬쩍
염탐하듯 들여다보네
2016년 12월 10일 발행. 시마을 작가시회 2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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