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의香氣

그녀의 지휘봉

湖月, 2005. 5. 18. 06:33

그녀의 지휘봉

 

 

 

 

김혜순

 

 

 

사랑에 빠진 나비가 어둠 속을 날아간다

어쩌자고 잠도 안 자고 밤중에 돌아다니는 건지

 

 

달도 없는 밤 강물이 입술을 달짝거리는 소리

길가의 나뭇잎들이 땅속에서 길어 올린 추억에 잠겨 몸을 떠는 소리

 

 

강물 속에서 조약돌들이 몸을 떨기 시작하자

바위들의 억센 피부마다 소름이 돋는다

 

 

소프라노가 테너 위로 올라서자

관객 속에서 터지는 느닷없는 고함소리

파닥거리던 그녀의 지휘봉이 흠칫 몸을 떤다

나비 한 마리에 묶인 음악당이 밤하늘로 이륙한다

 

 

바람이 연주하는 길고 검은 피리소리

창문이 덜컹거리고 복도가 소라고둥처럼 도를 말리고

도시의 골목들이 튿어진 옷고름처럼 날리다 말고

공중에 나선형으로 치솟아 오른다

아기들 잠든 방들이 부서지고

길 잃은 바람이 뒤돌아보며 높이높이 울부짖자

 

 

자동차들마저 길 밖으로 튕겨져 나간다

클라리넷과 모든 관악기가 불꽃을 길게 내뿜는다

모든 성부聲部들이 몸을 맞대고 떤다

 

 

사랑에 빠진 나비가 태풍 속을 난다

치솟아 오르다 쓰러지고 다시 쓰러지는 나비 한 마리

미쳐버린 오케스트라 공중에다 팽개친다

 

 

나는 창문을 열고 우리 아파트 옥상까지 찾아와

투신 자살한 젊은 여자의 시신을 오래, 오래 내려다본다

 

 

태풍의 눈처럼 거대한 고막이 풍경 속을 떠돈다

나비가 이제 그만 사랑을 검은 관 속에 가두었나

 

 

나비는 보이지 않고 느닷없이 검은 피아노가 열리고

수천만 개로 쪼개진 나비의 떨리는 살점들이

강물 위로 쏟아지기 시작한다

 

 

 

 

 

 

해설 이남호

 

  시인은 지금 음악을 듣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오랜 불면 속에서 너무나 예민해진 신경과 청각의 기억을 따라가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문득 어둠 속에 날고 있는 나비나 나방을 보고 자유 연상을 펼치고 있는 것일까? 어쨌든 "강물이 입술을 달싹거리는 소리" 와 "나뭇잎들이 땅속에서 길어 올린 추억에 잠겨 몸을 떠는 소리" 같은 희미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강가의 조약돌과 바위에 대한 감각적인 기억도 되살아난다. 이어서 소리 혹은 움직임은 점점 커지고 격렬해지고 마침내 거리와 세상을 뒤흔드는 태풍처럼 시인의 의식 속에서 휘몰아친다. "미쳐버린 오케스트라를 공중에다 팽개" 치는 것과 같은 난장판이다. 그리고는 다시 조용해진 것 같다. 마지막에는 수많은 소리 대신 강물 위로 쏟아지는 "수천만개로 쪼개진 나비의 떨리는 살점들"이 공간을 가득 채운다.

  이 시 속에 펼쳐진 여러 감각적 이미지들은, 우리가 상식적으로 지닌 지각 방식의 그물에 걸리지 않은 채 버려져 있는 어떤 감각 체험을 재현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김혜순

 

1955년 경북 울진 출생.

1979년 <문학과 지성>으로 등단.

시집 "또 다른 별에서"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 "어느 별의 지옥" "우리들의 음화"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 "불쌍한 사랑 기계" "달력 공장 공장장님 보세요" "한잔의 붉은 거울"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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