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집

달빛을 등에 지고 / 안행덕

湖月, 2024. 11. 17. 18:11

 

詩 선집 , 2021년 출간

 

나의 마일리지

 

눈물에도 마일리지가 있다

눈물은 공짜가 없으니까

 

누구는 마일리지 포인트로

미국 가는 비행기표를 샀다는데

나는 눈물의 마일리지로 사랑을 샀다

 

항공권 특별 카운트 서비스로 주는

포인트를 적립하면 지구를 반 바퀴 돌지만

평생 쌓은 나의 눈물의 마일리지

사랑의 특별 카운트 왜 몰라주나

 

눈물로 침묵으로 저장된 인생 카운트

나의 삶 나의 추억이 쌓인 포인트 점수

나 혼자 간직한 마법의 포인트 점수는

지구 반 바퀴보다 먼 나의 한평생

비파를 켜는 그녀

​잠이 달아난 동짓달 긴긴밤

낡은 기와집 지붕에 매달린 바람처럼

싸늘한 초승달 눈치를 살필 때

무심한 달팽이관을 흔드는 비파 소리

심금을 울리는 저 소리

생의 그물처럼 긴급 타전으로

나를 가두네 모스부호처럼......

비파나무에 걸린 별똥별은

잘 익은 비파 열매와 연애를 할 때

죄 없는 성장통을 울리던

비파를 켜는 그녀가 거기에 있네

고소한 빗소리

비가 내린다

비가 오는 날은 지짐이가 제맛이다

생각만으로도 군침이 돈다

 

자글자글 파전이 익는 소리

철판에서 빗소리 들린다

그 옛날 흰 수건 머리에 두른 어머니

돼지비계 한 덩이 솥뚜껑 위에 던져 놓고

장작불 피우면 들리던 고소한 빗소리다

아련한 소리에 눈을 감는다

고소한 빗소리 그리운 저 소리가

반백 년 지난 지금 다시 들린다

그때 그 토담 아래서 들리던 소리

지짐이 맛보러 오너라

뒤꼍에서 어머니날 부른다

 

달빛을 등에 지고

 

이산 저 산 산유화 봉긋한 입술이

환하게 벙그는 4월 어느 날

 

몇 달째 말문 닫은 우리 어머니

더는 못 참겠다는 듯

손을 흔들어 수신호를 하시더니

어둑어둑 해거름에 마실 나가시듯

집을 나서시네.

흰나비 날개처럼 소리도 없이 가시네

 

오매불망 저승길도 따라가겠다고

보채는 눈물은 본체만체하시네

 

한 번도 가본 일 없는 머나먼 길을

환하게 달빛을 등에 지고

꽃길을 걷는 듯 마실 가시듯 가시네

흰나비 꽃밭을 찾아가듯 훨훨 날아가시네

달빛을 등에 지고 2

어야디야

가자가자 어서 가자

내가 생겨나 난 곳 本鄕으로 가자

한 세상, 어야디야 잘 살았다

돌아보니 머나먼 길

꽃길도 가시밭길도

내가 감당할 만큼 주셨구나

 

어야디야

가자가자 어서 가자

괴나리봇짐 대신 달빛을 등에 지고

내 가는 길 환하게 비추며

어야디야 콧노래 부르며 本鄕으로 가자

사는 동안 가시밭길이라 험난하다

불평도 했지만 돌아보니 꽃길이었네

어야디야 가자가자 어서 가자

한 세상, 어야디야 잘 살았다

노래하며 춤추며 가자

내가 생겨난 本鄕으로 가자

경주 주상 절리

잔잔한 파도 멈칫거리다

놀란 듯 뒷걸음질하며

파도가 밀려간 자리

바닷가에 꽃처럼 누워 있는

저 검은 돌무더기

놀라워라

해국을 그려 넣은 용왕님의 부채인가

바닷가로 밀려오는 파도를

다스리는 저 웅장함

바닷가에 누워있는 저 주상절리

무엇이 안타까워

꽃처럼 누워서 돌이 되었나

 

바다 밑에서 잠자던 뜨거운 용암

잠을 깨어 튀어나왔다는데

찬란한 신라를 예언하려던 용왕님 손

바다 밑 용암이 시샘이라도 하였던가

아~ 신의 한 수로구나

가 을 간이역

작은 간이역에 추억 같은 긴 그림자로

누군가를 애타게 기다리며

두 줄의 긴 선로 변에서 서성이는 여자

기차는 기적을 울리며 산모퉁이를 돌고

기적이 울릴 때마다 가슴의 두근거림을

저 살살이 꽃이 살랑살랑 흔들림으로 말하네

 

바다가 보이는 작은 마을

당신이 도착할 레일 따라 열차는 정시에

멈춰 서지만 타는 사람도 내리는 사람도 없다

텅 빈 대기실을 기웃거리는 코스모스

그리움으로 길어진 목이 안쓰럽다

날은 저물고 그리웠던 날들을 회상하듯

달빛만 내려와 빈 벤치를 지키고

갈 곳 잃은 가랑잎만 서성이는 가을 간이 역

 

 

화살나무의 꿈

 

가지마다 화살을 장전하며

무사의 정신을 키우는

단호함은 화살나무의 의무다

 

봄밤에 새파란 화살촉을 키우며

승전의 전의를 불태우다가 언뜻

궁금증으로 아직도 몸살을 앓는다

아비의 아비는 정말 무사였을까

 

계절이 바뀔 때마다 자진해서 속죄하며

화살은 위험한 장난이라고

거두절미하고 레드하트를 만들며

핑크빛 청춘으로 후생을 꿈꾸는 나무

 

귀전우鬼箭羽

ㅡ화살 나무ㅡ

꽃보다 아름다운 열매로

귀신을 속이고

바람의 음모에 가담하며

위험한 장난을 꿈꾸는 너

너의 겨드랑이에 감춘 비화는

나비의 날개처럼 위장하고

아무도 모르게 홍심을 적중하는

귀신을 쏘는 화살이란 말이지

모사꾼의 말을 믿지 않는다는 모사 나무가

바로 너란 말이지

귀신도 무서워한다는 말 믿어도 될까

아바타 지우기

노란 울음이 지친 듯

붉은 얼룩으로 변해가는데

숲의 웅성거림은

나를 보고 키득거린다

 

멀쩡한 잔돌 툭툭 발길질해대도

체머리 설레설레 흔들어 봐도

상처의 기억은 꼬리를 문다

 

오래전 삼킨 울음이 살아서

봉인을 뜯고 들썩거린다

뺨이 얼얼하다

접수한 암호에 재빨리 응답하라

고막을 염탐하던 모스부호

거추장스러운 기억은 삭제하라

타다 타다닥 암호로 타전된다

응답에 접수된 필름

재빨리 명령에 복종하니

흘러간 다큐멘터리 한 편

휘리릭 바람 따라 사라진다

탓하지 마라

바람이 불어도

세월이 흘러도

탓하지 마라

다 제 할 일을 하고 있단다

풍성한 가을걷이

한 아름 안은 농부처럼

내년에도 이 풍요를 이을 씨앗이

소중하다가 덧없는 인생을 탓하다가

말씀이 내 안에 살아 계시니

아무것도 탓하지 말자

소리 없는 가르침이 나를 깨우네

들꽃도 목마를 때 비를 주시고

작은 산새도 풀벌레도 내일을 걱정하지 않네

바람이 불어도

세월이 흘러도

탓하지 마라

마음의 눈을 열어 믿음의 열매를 보라

카멜레온 꽃

ㅡ포체 리카ㅡ

 

사는 게 무언지

이삿짐 화분에 담긴 작은 꽃 이파리

잠깐 비친 햇살에 생긋 윙크하고

얼른 얼굴색 바꾸며 붉은 하트를 보낸다

응달진 베란다 난간에서 어둠을 기다리며

금방 또 얼굴색 바꾼다

가성비를 아는 꽃 포체 리카

저 작은 풀잎도 사는 게 무언지 아나보다

빛과 온도에 예민한 반응 보일 때

비로소 예쁘다는 소릴 듣는다는 걸 알았나 보다

 

자아(自我)을 잃어버린 카멜레온

현실은 순간 포착이 빨라야 산다고 배웠나 보다

제 몸을 재빨리 변신하는 건 그가 살아남기 위함이다

봄부터 가을까지 피고 지고 지쳐도

소스라치는 아픔을 참고 수족을 잘라 종족 늘리며

앙다물고 살아야 하는 운명이라는 걸

저 작은 풀잎이 어찌 알았을까

시들은 꽃이 되어 쉼터로 온 가정 폭력 피해 할머니

까무룩 잠이 들더니 꿈속에서 카멜레온 꽃이 되었나

잠든 얼굴이 꽃처럼 환하다

 

마누라 지청구

 

감자가 싹이 나면 못 먹는 것도 모르세요

마누라 지청구에

검은 봉다리를 들고 서 있는

저 남자의 뒤태가 어정쩡하다

마누라 심부름으로 사 오긴 했는데

어쩌나 어쩌나 구시렁대다가

검은 봉다리 슬며시 열어보니

주름진 얼굴을 외로 꼬고 누워 있는 감자

마누라처럼 중얼거리는데

바다의 연어나

대지의 감자나

모두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걸 모르세요

새로 태어나는 제 새끼를 위해

제 한 목숨 바치는 자연의 섭리를 아직도 모르세요

싹튼 감자의 지청구에

어정쩡한 남자는

새파랗게 놀란 감자의 눈(싹)을 보고 씩 웃어주네

이어도는 알고 있다

아직도 무간지옥을 방황하는 너

이어도 이어도 끝 간데없는

세월의 실타래 풀어 놓고

실마리를 찾지 못하네

망망 바다 밑에 뿌리를 내린 암초 ​

청춘 바친 어부들 영혼을 부여안고

울음 곳간 열어놓고

해녀들 곡소리를 저장하고 있구나

노구로 파도 만평을 위로하기엔

이미 지친 해녀의 노래

울며 매달리는 파도야 파도야

하루에도 수 십 번씩

잠수하다가 솟구치는 바다의

처절한 아픔을 이어도는 알고 있구나

백치여서 다행이다

 

나의 방황은

언제나 바다 앞에서 시작되는데

어쩌면 길 잃은 여행의 시작이다

 

파도의 음계는 언제나 오독으로

나를 당황하게 만들고

무작정 이정표 없는 길을 걷게 한다

 

계절과 계절 사이에서

아무 거리낌 없이

죽어가고 태어나는 생명을 보라

그들은 하늘의 이치를 알고 있다

 

밤마다 향초를 켜고

두 손 모아 번제燔祭를 올리는

제사장의 간절함을 너는 아는가

 

다만 하늘의 이치를 모르는 나

백치여서 다행이다

 

목탁새

이른 아침부터 참회하고 참선이라도 하는지

숲속에 청아한 목탁 소리

목탁 치며 염불하는 너는 누구냐

무슨 사연 그리 깊어

죄 없는 나무를 쪼아대며 애절히 하소연하느냐

그토록 간절한 발원이라면 부

천인들 돌아보지 않을까

새야 새야 목탁 새야 저

나무속 깊이 파고 들어가

연화좌蓮花座라도 틀고 앉으려 하느냐

​네 목탁 소리 청아하고 가련해서

서러운 비구니도 가던 길 멈추고 합장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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