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몰래 오줌을 누는 밤
안명옥
술을 마시고 늦은 밤
집으로 돌아간다 참지 못할 만큼 오줌이 마려워
걸음이 평소보다 급하다 오줌 마려운 것이,
나를 이렇게 집 쪽으로 다급하게 몰고 가는 힘이라니!
오줌이 마렵지 않았다면 밤 풍경을 어루만지며
낮엔 느낄 수 없는 밤의 물컹한 살을 한 움큼
움켜쥐며 걸었을 것을 아니 내 눈길이
보이지 않는 어둠 저편, 그 너머까지
탐색했을 지도 모를 것을
지나가는 사람들 없는 사이
무릎까지 바지를 끌어내리고 오줌을 눈다
오줌을 누는 것은 대지와의 정사 혹은
내 속의 어둠을 함께 쏟아내는 일,
다시 오줌이 마려워오는 순간이 오기까지
내 속이 잠시나마 환해지는 일
우두커니 서 있던
나무가 부르르 떤다
놀라워라,
일탈의 쾌감이 내(川)를 이뤄
이렇듯 밤의 대지를 뜨겁게 적실 수 있다니,
어둠 속에서 남몰래 오줌을 누는 밤
달이 된 엉덩이가 공중으로 둥둥 떠올랐다
붉은 수수밭
안명옥
아침마다 팬티 하나를 더 가지고 다닌 적 있었다
등 떠밀어대는 바람의 손에
밀물로 들어선 지하철 안
비릿한 바다 냄새가 출렁거리고
팔 하나와 가방은 어느 아주머니 가슴 위에 수평선으로 걸려있고
사람과 사람이 침몰 직전의 배들처럼 흔들리는 시간
청바지를 입은 은밀한 부위에
어느 날은 두툼한 물고기가 다가와 살래살래 문지르다 가고
어떤 날은 배 한 척이 노를 저어와 비벼댔다
뒤를 돌아보면
점잖은 물고기의 표정들
몸 비틀어 저항하는 눈으로 쏘아봐도 달라지지 않았다
늦더라도 버스를 탈 걸,
여러 번 갈아타더라도 버스를 탈 걸,
치욕의 침이 입안에 흥건하게 고였다
먹은 것 없는 아침이
자꾸 헛구역질을 할 때
몸은 붉은 수수밭을 지나온 듯
젖어버렸다
개봉에서 종로3가까지 내내
어이없는,
망각된 몸의 멍한 반응
그런 날은
회사 출근 도장 찍기 전에 화장실에서 젖은 팬티를
갈아입는 것으로 하루가 시작되었다
-안명옥 시집 <칼>, 천년의시작, 2008. 한국문화예술위원 우수도서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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