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혀 외 1편
최재영
마량리* 동백 숲에 들어선다
온 천지 꽃대궐인듯 만개한 봄날 오후
꽃 잎 겹겹이 바다가 접혀있어
한 시절 격랑을 이고 숨가쁘게 출렁인다
동백 둥치 깊은 곳에서 물소리가 흐르고
봄맞이 나온 노인들
그 숲에 들어 회춘이라도 하였는지
낯빛이 환하게 달아오른다
주름잡힌 눈자위 자글자글 물결이 일때마다
쉴 새 없이 달싹이는 혀
은밀한 눈빛을 주고받으며
입 안 가득 동백을 퍼 나르느라 분주한데,
해마다 봄을 키워 세월을 부풀렸다
꽃 잎 같은 혀들이 육지를 왕래하느라
마량리는 붉은 소문으로 들썩거리고
일제히 정분이라도 난 것일까
가슴에 연서 한 장씩 품고
발그레해지는 맹약의 계절
수백 그루 열락이 피고지는 사이
저 켠 말라비틀어진 고목에
뜨거운 혀 한 장 돋아나는 중이다.
*마량리 : 충남 서천군 소재. 동백군락지
누우
화면 가득 누우 떼가 이동중이다
누우- 하고 되뇌이면 입 안에
새파란 풀물이 들어찬다
쌉쌀한 즙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동안
사자의 기습이 있었고
예정된 죽음들은 속수무책이다
찢겨진 살점이 붉은 꽃처럼 피어나는 사바나
무리를 쫓는 내 눈에도 온통 핏물이 스미고
푸른 즙대신 충혈된 육질이 들어와 고인다
오, 이 질기고 강렬한 질감이라니,
습관적으로 사바나를 씹으며
나도 모르게 포식의 습성을 답습해 왔는지도,
낮은 구름을 되새김하는지
몇 모금의 소나기가 지나고
세상엔 여전히 수많은 누우 떼가
하루종일 지구라는 화면 속을 걷는다
먹이를 노리는 건 맹수 뿐만이 아니다.
루파나레라
최재영
골목 입구 길 바닥에 새겨진 루파나레라*
열쇠 구멍을 닮은 사랑의 표적이다
내게 알맞은 키를 돌려야
제대로 된 쾌락을 즐길 수 있다는 의미일까
매몰되었던 고대의 환락가를 들어서자
온갖 종류의 체위가 전시되어 있다
사랑은 어두울수록 더 대담한 것
숨도 쉴 수 없는 화산재 속에서
수천 년 동안 성교 중인 남녀를 만난다
배를 바짝 밀착시킨 사이엔
그들을 떼어놓을 시공이 없다
격렬했을 절정들
신음을 뱉어낼 새도 없이 굳어버린 혀는
순간이 영원을 간다고 말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이들은 서로에게 어떤 체위의 키를 꽂은 것일까
끓어오른 용암처럼 수천 번도 넘게
세상의 낮과 밤이 뒤집어지고
매몰된 도시가 뜨겁게 달아올랐으리라
진열장 안의 은밀한 순간을 들여다보며
화석이 돼버린 오르가슴을 즐기는 사람들
그들은 어떤 사랑을 탐하고 있는가
* 루파나레라 : 폼페이의 홍등가를 들어가는 골목 입구 바닥 표지판
최재영
경기 안성 출생. 2005년 강원일보, 한라일보 신춘문예 당선.
2007년 대전일보 신춘문예 당선. 2007년 제 31회 방송대학 문학상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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