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과 거미 / 안행덕
열이레 달빛이 처마 밑 어둠을 밀어낸다
어둠에 익숙한 거미 한 마리
조심스러운 사냥을 꿈꾼다
조심조심 묶어둔 거미줄에 걸린 환한 달빛
살아서 퍼덕거린다
한번 걸린 먹이는 놓아 줄 수 없다는 듯
예리한 발톱으로 줄을 당긴다
출렁, 외줄을 타는 광대처럼 날렵하다
풍경도 없이 사라지는 척
바람에 흔들리는 달빛을
슬쩍 바람 사이에 가볍게 옭아맨다
그렁그렁한 슬픔 하나 어둠에 매달아 놓고
보이지 않는 덫으로 달빛을 유혹한다
수의를 짓다/ 안행덕
떨리는 손으로
어머니 수의를 짓고 있습니다
머지않은 날
홀연히 가신다기에
노란 안동포 삼베 한 필 끊어다
어여쁘신 날개 수의를 짓고 있습니다
빈손으로 왔으니 빈손으로 가야한다고
주머니조차 만들면 안 된다 하십니다
이승의 맺힌 마음 저승으로 가져가면 안 된다고
매듭을 지어서도 안 된다고 하십니다
실 끝을 옭매지도 말라 하십니다
치자열매 노란 빛깔 흘러나오듯
어머니 지나오신 발자국이
눈물에 번져 흐려집니다
한 많고 설움 많아 떨치기 힘든 세월
차마 놓지 못하시고
눈꺼풀 무겁게 붙들고 계십니다
훨훨 가볍게 한 세상 날아오르시라고
금빛 날개 고이 달아
어머니 수의를 짓고 있습니다
항해 / 안행덕
검은 고무 튜브에 하반신을 감추고
납작 업들인 채 헤엄을 치는 사내
하반신의 폐허에
도마뱀 꼬리처럼 돋아난
고무 지느러미를 흔들며
시장통을 유영한다.
오물이 질펀한 바닥에
쉼표를 찍고 행간을 치는 사이
퍼렇게 날이 선 시선들이
두려움에 떠는 작은 심장을
인정없이 냉각시킨다.
파도처럼 밀려왔다 밀려가는 인파
뱃고동처럼, 발걸음 소리만 울릴 뿐
등대 같은 적선의 빛은 없어라
진종일 사나운 파도에 지친 시린 눈빛
안쓰럽게 지켜보던 좌판의 노파
끌끌 혀를 차며 지폐 한 장 던진다.
좌초될 듯 흔들리던 고무 지느러미
그제야 두려움 없이 인파를 헤치며
거친 바다를 건넌다.
내 바람 되거든/ 안행덕
제상 위에 다소곳한 어머니
흑백 사진틀에 갇히신지 어언 20년
해마다 그 자리 그곳에서 젖은 눈으로
어김없이 나를 기다리신다.
경전을 펼쳐 놓은 듯 차려진 제수 사이로
파릇파릇 새순처럼 돋는 그날들
봉숭아 꽃물을 들여야 저승길이 밝아진다고
손가락을 흔들며 내밀던 파리한 손
안개 같은 추억이 향처럼 피어오른다
퇴주잔에 술잔 비우는 내 손가락
어머니를 닮아가는 걸 이제 알겠네
눈물 같은 촛불 앞에 나는 어머니와 잠시 마주앉아있네
어머니의 情 뜨겁게 내 손끝에 전해지고
부드러운 음률로 들려주던 그 사랑 노래
내 몸 안에 붉은 점자로 율법처럼 찍혀가네
조금씩 희미해지는 그 빛이 두려워
후다닥 일어서 축문에 불을 붙이고
뜨거운 고백 고운 넋, 두 손으로 받들어
재가 된 당신을 바람에 실어
어느 하늘가 그곳에 보내드리고
내 바람 되거든 그때 허공에서 다시 만나리
초례청 [醮禮廳] / 안행덕
원 삼 족두리 홍의 단상을 보는 내 눈이 시리다
내 살점 떼어내어 이슬처럼 굴리다가
아직 여물지도 않은 것을
바람 앞에 내 놓았다
무언가 먹어야 한다고
오물거리던 조그만 입
낯선 세상이 부끄러워 꼭 감은 두 눈
너무 작아 밥풀 같은 발가락
정말 숨을 쉴 수 있을까 걱정했던 작은 콧구멍
네가 태어나던 날 너무 신기해
보고 또 보고
살며시 작은 손을 잡아보는 내 손에 전류가 흘렀었지
어느덧 자라 어미 품을 매미 허물처럼
벗어놓고
제 짝을 맞이하는 어엿한 새각시가 되었구나.
연지곤지 바르고 족두리가 파르르 떠는 너를 보는데
한쪽 가슴은 기쁨과 환희가 넘치는데
한쪽 가슴은 왜 이리 허전하고 시린지
너도 네 새끼 낳아 키워봐라
그때 에미 속을 알리라고 하시던
그리운 목소리가 귓전에서 이명처럼 울린다
시예문학 12집 수록 (제2회 황금찬 문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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