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표작

시예문학 제12집 발표작

湖月, 2009. 5. 20. 13:42

 

 

달빛과 거미 / 안행덕



열이레 달빛이 처마 밑 어둠을 밀어낸다

어둠에 익숙한 거미 한 마리

조심스러운 사냥을 꿈꾼다

조심조심 묶어둔 거미줄에 걸린 환한 달빛

살아서 퍼덕거린다

한번 걸린 먹이는 놓아 줄 수 없다는 듯

예리한 발톱으로 줄을 당긴다

출렁, 외줄을 타는 광대처럼 날렵하다

풍경도 없이 사라지는 척

바람에 흔들리는 달빛을

슬쩍 바람 사이에 가볍게 옭아맨다

그렁그렁한 슬픔 하나 어둠에 매달아 놓고

보이지 않는 덫으로 달빛을 유혹한다



수의를 짓다/ 안행덕



떨리는 손으로

어머니 수의를 짓고 있습니다

머지않은 날

홀연히 가신다기에

노란 안동포 삼베 한 필 끊어다

어여쁘신 날개 수의를 짓고 있습니다

빈손으로 왔으니 빈손으로 가야한다고

주머니조차 만들면 안 된다 하십니다

이승의 맺힌 마음 저승으로 가져가면 안 된다고

매듭을 지어서도 안 된다고 하십니다

실 끝을 옭매지도 말라 하십니다

치자열매 노란 빛깔 흘러나오듯

어머니 지나오신 발자국이

눈물에 번져 흐려집니다

한 많고 설움 많아 떨치기 힘든 세월

차마 놓지 못하시고

눈꺼풀 무겁게 붙들고 계십니다

훨훨 가볍게 한 세상 날아오르시라고

금빛 날개 고이 달아

어머니 수의를 짓고 있습니다




항해 / 안행덕



검은 고무 튜브에 하반신을 감추고

납작 업들인 채 헤엄을 치는 사내

하반신의 폐허에

도마뱀 꼬리처럼 돋아난

고무 지느러미를 흔들며

시장통을 유영한다.



오물이 질펀한 바닥에

쉼표를 찍고 행간을 치는 사이

퍼렇게 날이 선 시선들이

두려움에 떠는 작은 심장을

인정없이 냉각시킨다.

파도처럼 밀려왔다 밀려가는 인파

뱃고동처럼, 발걸음 소리만 울릴 뿐

등대 같은 적선의 빛은 없어라



진종일 사나운 파도에 지친 시린 눈빛

안쓰럽게 지켜보던 좌판의 노파

끌끌 혀를 차며 지폐 한 장 던진다.

좌초될 듯 흔들리던 고무 지느러미

그제야 두려움 없이 인파를 헤치며

거친 바다를 건넌다.





내 바람 되거든/ 안행덕


 


제상 위에 다소곳한 어머니

흑백 사진틀에 갇히신지 어언 20년

해마다 그 자리 그곳에서 젖은 눈으로

어김없이 나를 기다리신다.

경전을 펼쳐 놓은 듯 차려진 제수 사이로

파릇파릇 새순처럼 돋는 그날들

봉숭아 꽃물을 들여야 저승길이 밝아진다고

손가락을 흔들며 내밀던 파리한 손

안개 같은 추억이 향처럼 피어오른다

퇴주잔에 술잔 비우는 내 손가락

어머니를 닮아가는 걸 이제 알겠네

눈물 같은 촛불 앞에 나는 어머니와 잠시 마주앉아있네

어머니의 情 뜨겁게 내 손끝에 전해지고

부드러운 음률로 들려주던 그 사랑 노래

내 몸 안에 붉은 점자로 율법처럼 찍혀가네

조금씩 희미해지는 그 빛이 두려워

후다닥 일어서 축문에 불을 붙이고

뜨거운 고백 고운 넋, 두 손으로 받들어

재가 된 당신을 바람에 실어

어느 하늘가 그곳에 보내드리고

내 바람 되거든 그때 허공에서 다시 만나리






초례청 [醮禮廳] / 안행덕



                                        


원 삼 족두리 홍의 단상을 보는 내 눈이 시리다

내 살점 떼어내어 이슬처럼 굴리다가

아직 여물지도 않은 것을

바람 앞에 내 놓았다



무언가 먹어야 한다고

오물거리던 조그만 입

낯선 세상이 부끄러워 꼭 감은 두 눈

너무 작아 밥풀 같은 발가락

정말 숨을 쉴 수 있을까 걱정했던 작은 콧구멍


네가 태어나던 날 너무 신기해

보고 또 보고

살며시 작은 손을 잡아보는 내 손에 전류가 흘렀었지


어느덧 자라 어미 품을 매미 허물처럼

벗어놓고 

제 짝을 맞이하는 어엿한 새각시가 되었구나.

연지곤지 바르고 족두리가 파르르 떠는 너를 보는데

한쪽 가슴은 기쁨과 환희가 넘치는데

한쪽 가슴은 왜 이리 허전하고 시린지

 


너도 네 새끼 낳아 키워봐라

그때 에미 속을 알리라고 하시던

그리운 목소리가 귓전에서 이명처럼 울린다

 

 

 


시예문학 12집 수록 (제2회 황금찬 문학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