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창작법

시조작법10창작의실제(심상의형상화)

湖月, 2005. 12. 24. 12:04
● 心象의 형상화


이미지(image)는 중요한 시의 요소이다. 시를 시답게 할 뿐 아니라 시의 양감(量感)을 풍부하게 해주는 요소가 바로 이미지의 전개이다.


앞에서 우리는 "느낌"과 "표현"의 문제를 알아보았고, "말투"와 "어조"를 통한 "가락"과 그 "짜임새"가 어떤 것인가를 검토해 보았다. 그리하여, 시조가 갖추어놓은 그 리듬구조가 어떤 놀라움으로 이루어지는가를 실제 작품을 통해 헤아려 보았다.


이미지를 보통 형상(形像)이라 하지만, 사상(寫像)과 영상(影像)이라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시나 시조에서는 대체로 심상(心象)이라는 말로 통용되고 있다.


넓은 의미로 볼 때 이미지는 감각적 경험과 관계가 있는 그러한 모든 표현이다. 즉 "형상"을 뜻한다. 어떤 사물이면 사물, 겪은 일이면 그 일을 마음속에다 입력(入力)시켜서 감각적으로 되살려내는 그러한 표현을 뜻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넓은 뜻으로 보자면 표현하는 일 모두가 "형상" 아닌 것이 없다 할 정도이므로, 시조에 있어서 이미지의 적용 범위는 대단히 넓고 포괄적인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좁은 의미의 이미지는 "비유"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러나 이 이미지는 수사학에서 말하는 설명이나 장식적인 쓸모가 아니다. 설명, 혹은 장식적 쓸모는 떼어내어도 좋을 때가 많으나, 이미지를 이룬 표현은 시의 본질적인 표현이므로, 이 요소가 제거되면 시 자체가 무너지거나 빛을 잃고 말 우려가 있을 뿐만 아니라, 극단적으로 말하면 시 이전의 "잡문(雜文)"으로 타락할 우려마저 없지 않다. 시에 있어서 이미지는 필요불가결한 요소이면서 무시되어서는 안될 "핵산(核酸)"인 것이다.


시는 다른 문장과는 달리 간결하다는 것이 그 특징이다. 간결한 문장이면서 여러 생각과 느낌들을 갖도록 하는 것이 시이다. 시조를 포함한 모든 운문이 간결한 문장이면서도 생생한 표현이어야 한다는 데서 이미지의 형상화는 더욱 요청되며, 비유가 그 역할을 크게 담당한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다.


검은 박쥐떼 같이
밤은 날개를 펴고
회한(悔恨)은 파도같이 일어
기슴 기슭을 부딪는다.
수묵색(水墨色)
짙은 안개 속에
외로운 나의 항로(航路)여

- 이은상의 "밤"의 첫 수


이미지는 마음이 되살려내는 감각적인 모습 혹은 그 상태라 할 때 "형상", "사물", "구체적인 것" 등이 함께 작용되어야 한다. 서벌 시인의 이론을 토대로 이야기를 풀어가기로 하자.


이은상의 시조 "밤"의 첫 수는 초장과 중장에다 직유(直喩)의 쓸모를 이용하여 그 일을 이루어내고 있다. "같이"라는 직유가 두번 씌어진 것이 바로 그 역할이다.


초장의 경우, 이 한 장을 이루도록 하는 주상(主想) 혹은 중심축이 "밤"이다. 그것도 날개를 폈다는 밤이다. 우리가 흔히 맞는 "밤"은 그저 어둡고 아늑하게 쉬게 하고, 잠자도록 하는 저적인 밤이다. 그러한 밤이 날개를 폈다고 하는 데서부터 벌써 시적 상태를 나타낸다. 이 시조의 이미지는 정적인 밤이 아닌 동적인 밤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자체만으로는 그저 밤의 분위기가 막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이 점을 구체적인 상태로 형상화하기 위해 <밤은 날개를 펴고>와 하나이도록 이어 놓았다. 그처럼 서로 연결 고리를 갖게 하는 다리 구실을 하는 것이 바로 "같이"라는 직유의 쓰임새이다. 그리하여 밤은 날개를 폈는데, 그것이 검은 박쥐떼 같이 날개를 폈다는, 눈에 보이듯 구체적인 물상을 끌어들여 사실성을 부여할 뿐만 아니라 인간의 상상력을 조화·통일시켜내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좀 더 주의력을 기울여야 할 필요가 있다. "검은 박쥐떼"에 관한 문제이다. 밤이 날개를 폈는데, 한 마리의 박쥐가 날개를 펴듯이 그렇게 편 것이 아니라 숱한 박쥐들이 떼지어서 날개를 편, 그런 상태라는 점이다. 이 상태에다 "검은"이라는 말이 지닌 의미를 더하여 보라. 무엇인가 불길하고 흉흉한 분위기가 감돈다고 볼 수 있다. 어둡고도 불길한 예감, 그런 시대의 밤임을 확인하게 된다. 여기에 "검은 박쥐떼"가 주는 매우 상징적이면서도 감각적인 이미지의 쓸모가 있고, "같이"라는 직유법이 시를 설명하기 위한 도구로 쓰여지는 것이 아니라 보다 생생한 모습, 생생한 표현이 되도록 돕고 있다는 사실을 갈파해야 할 것이다.


이런 이미지의 작용으로 다음 장을 연결시켜 보라. 또 다른, 독립된 이미지의 작용이 앞의 장과 연결되면서, 설명이 아닌 살아 움직이는 생동감 넘치는 현장감(상태)을 나타낼 것이다.


회한은 파도같이 일어
가슴 기슭을 부딪는다.


어둡고도 불길한 시대의 이미지를 예감으로 나타낸 바 있는 시인의 내부가 이러하다.


일제 강점기를 아프게 겪어내고 8·15와 6·25를 거쳐낸 시인의 내부 상태, 온통 "회한" 뿐인 상태이다.


그러나 "회한"은 마음속의 일이다. 그만큼 이 말은 막연하고 추상적인 언어다. 다함없이 절실하기만 한, 이 마음속의 일이 어떤 모습을 빌어서 형용(形容)을 나타내지 않으면 구체적인 표현의 리듬을 탔다고 할 수 없다. 역시 이미지의 쓸모를 지녀내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회한은 파도같이 일어>로 나타나 구체적이면서도 생생한 하나의 모습을 그리게 된 것이다. 어떤 사물을 빌어서 작자의 마음속이 그러함을 빗대어 나타낸 것이다. <파도같이 일어>난 "회한"이 <가슴 기슭을 부딪는다>고 할 때, 내부의 일이지만 외부의 일처럼 생생하게 다가오는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두 개의 장이 두 가지 큰 이미지를 조직하는 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이 또한 "같이"라는 직유의 쓸모가 도와주어서 가능할 수 있었음을 확연하게 알아낼 수 있는 것이다.


수묵색
짙은 안개 속에
외로운 나의 항로여.


초장·중장의 이미지를 하나의 결론으로 마무리 짓는 종장의 이미지이다. 그러나 앞에서와 같은 직유의 수법이 아니다. "수묵색" 뒤에는 "처럼"이나 "같은"이 붙어 있지 않다. 바로 "수묵색 / 짙은 안개 속"이다. "수묵색"으로 되어 있는, 그처럼 "짙은 안개 속"이다. 직유의 역할 없이도 이와 같이 비유해 낼 수 있다. 이것이 곧 은유(隱諭·metaphor)의 수법이다. 직유의 수법보다는 차원이 한결 높다고 할 수 있는 비유라 할 것이다.


어둡고도 답답했던 시대 <"회한이 파도같이 일어서 가슴 기슭을 부딪는>, 그와 같은 시인의 <외로운 항로>, 그 항로가 바로 <수묵색 / 짙은 안개 속>의 항로로 매듭지어지고 있다.


그러나 앞에 든 예문의 시조는 <직유>를 너무 남용하고 있다. 두개의 장이 <직유>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점을 피하고서 이미지를 짤 수 있어야만 더 좋은 시조, 표현 기법이 능란한 시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진달래 사태진 골에
돌 돌 돌 흐르는 물소리.

제법 귀를 쫑긋
듣고 섰던 노루란 놈,

열적게 껑청 뛰달아
봄이 깜짝 놀란다.

- 이호우의 "산길에서"


이 시조에서 애써 소재가 될 만한 것을 찾자면, "진달래"와 "물소리"와 "노루" 등 이런 것들이 하나로 어울린 "산길"이라 할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이 시조는 단순한 하나의 소품에 지나지 않고, 단순한 하나의 서경시(敍景詩)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시나 시조는 그런 피상적인 관점을 조금도 허용하지 않는다. 놀라운 이미지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단순한 풍경 묘사가 아니란 말이다. 풍경을 설명하고 있는 구석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작자의 생각, 내면의식이 시각적으로 형상화되어 있되 그것이 생생하게 재생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도 은유만의 능숙한 수법으로 이루어져 있다.


진달래 사태진 골에
돌 돌 돌 흐르는 물소리


초장에 이루어진 시각적 이미지는 참으로 신선하기만 하다. <진달래 사태진 골>을 연상해 보라. 온통 진달래가 산을 뒤덮어 사태(沙汰) 진 그런 골짜기가 아닌가. 그 빛깔을 연상해 보라. "진달래"와 "사태"라는 말뜻을 각각 갈라서 느껴 보고 합쳐서 느껴 보라는 이야기다. 온통 진달래로 (혹은 그 빛깔로) 무너져 내리는 골짜기, 이 극명한 시각적 영상 속에 "돌 돌 돌"하는 물 흐르는 소리를 상상해 보라. 바로 살아서 움직이는 한 폭의 그림 아닌가.


자질구레하게 설명하지 않으면서 요긴한 말로써 이처럼 살아 움직이는 그림을 그려 놓기란 그리 수월한 일이 아니다. 은유의 수법으로, 그와 같은 이미지로 짠 채색화(彩色畵)와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이 그림은 가장 한국적인 자연 한 폭을 마음에다 이미 담아 두었다가 설명을 말끔히 걸러내고 심상(心象)만으로 재생시킨 것이다. 그것도 매우 감각적으로, 그리고 구체적으로(이것을 잘못 짚으면, 그냥 경치를 묘사한 것처럼 느껴지리라) 살려내고 있는 것이다.


제법 귀를 쫑긋
듣고 섰던 노루란 놈,


이 구절 역시 시인의 마음이 그려낸(재생해낸) 아주 주관적인 그림이다. 시인의 마음이 물소리를 듣고 있는 일이지, 노루가 듣고 있는 것이 아니다. 노루가 듣는 것처럼, 그래서 귀가 "쫑긋"하는 것처럼 만들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영락없이 노루가 그 짓을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게 바로 이미지가 빚어내는 놀라운 효과인 것이다.


열적게 껑청 뛰달아
봄이 깜짝 놀란다.


노루가 열적게도 껑청 뛰어달아나는 모습, 그 때문에 봄이 깜짝 놀란다는 일은 거짓말이라도 이만저만한 거짓말이 아니다. 그런데도 사실처럼 보이는 것 또한 야릇한 일이다. 있는 그대로의 경치가 아닌 마음의 경치이기에 거짓말이 사실이 되며, 사실의 세계를 뛰어넘는 신선한 이미지를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표현 기법의 한 극치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시조가 도달한 이미지의 차원이 어느 정도인가를 재인식할 수 있게 된다.


* 껑청 = 껑충 뛰는 모습에다 휘청하는 모습을 순간적인 일로 겹쳐 놓은 표현.
* 뛰달아 = 뛰어 달아나는 순간적인 모습을 그린 합성어(갈봄여름없이→김소월).


시의 세계가 상상력에 의해 창조되는 공간이기 때문에 하나의 새로운 세상(상태)을 탄생시키기 위해서는 이처럼 말을 만들어서 (새롭게 압축시켜서) 쓸 필요도 있는 것이다. 이만한 효과 때문에 "봄이 깜짝 놀란다"고 하는, 참으로 빛나면서도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순간적인 세계가 태어나는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