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월정(弄月亭)
저만큼 높이 언제 올라갔는지
온화한 미소로 조용히 세상을 내려다보네
달그림자에 할 말 이미 잊은 나그네
달빛이 지어내는 시 한 수에 취해
달아달아 이리와 내 술 한잔 받게나
정자 아래 너럭바위 사이를
조심조심 흐르는 여울에 빠진 저 달 보소
부끄러운 줄 모르고 발가벗고 미역을 감네
나그네 희롱에도 눈 하나 까딱 않고
물속에 나신으로 누운 달
명쾌한 시 한 수로 응대하니
정자에서 거드름 피던 나그네
술에 취하고 월광에 취해서
오늘밤 잠 못 이루겠네
부용화처럼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마침맞은 표정을 짓기가 그리 쉬운가요
정숙하면서도 매혹적인 자태
부용화를 닮으려고요
무진 애를 쓰며 살아도
그대 날 보아주지 않으니
어제도 오늘도 애끓는
숯 껌정 이내 속을 아시나요
고요한 밤에
구름을 건너 누옥을 찾아온
창 넘어 달빛 보면
우수 어린 눈빛이 당신 같아
비단신 내어놓고 길 나설 채비를 하지요
벼랑 아래 핀 부용꽃처럼
천지간 가약이 순간을 흐르고
꽃잎처럼 떨어지는
외로운 영혼 그 설움을 아시나요
동짓날 밤
마른 바람이 삭정이를 흔들며
외로운 듯 천천히 지나가는 밤
생의 무딘 이야기, 동지 팥죽에
휘휘 저어 넣고 한술 떠본다
수없이 길어 올리고 풀어낸 세월이건만
긴긴밤, 동짓날 밤은
어쩌라고 잠마저 달아나는지
눈처럼 흰 새알심에
단팥죽처럼 마음마저 부드럽게
촉촉이 젖어들던 날
고운 수수 빛깔 술 한 모금에
세상이 다 내 것인 줄 알았지
어둠을 지우면 또 새날이 온다며
곡절 많은 사연일랑
달아나는 밤바람에 던져주고
아늑하고 따듯한 고향으로
돌아오라 말하던 널 그리며
오늘도 동지 팥죽 한 그릇 비워 내며
하얀 새알심을 헤아려 보는데
섬섬閃閃히 늑골 사이로 빠져나가는
바람 소리 들리는 밤
첫눈
한걸음에 오지 않았으리
먼 산도 잠든 시간
밤새도록 조심조심 내린 눈
나뭇가지에 조용히 앉아
밤이 새도록 아름다운 약속 지키려
말없이 창밖에서 그렇게 떨고 있었구나
분분히 날리던 꽃잎 대신
새하얀 눈송이로
나뭇가지에 조용히 앉아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 말도 못하고
밤이 새도록 애절하게 기다리며
눈물 글썽거리고
그렇게 발자국을 지우고 있었구나
새하얀 너의 미소가 저만큼
가고 있는데
첫눈처럼 그대 내게로 오지 못하고
추억으로 거기 그렇게 있었구나
쑥
눈(雪)바람 마디마디 에이는 그 아픔
속잎에 감춰두고 견뎌낸 가녀린 것
봄 햇살
환한 미소로 다정하게 보듬네
논둑도 밭둑에도 메마른 산비알도
그윽한 향 담아내는 신비한 재주 좀 봐
비구니
발자국처럼 파릇파릇 고와라
쑥 같은 그녀
아지랑이 춤추는 곳 봄볕이 기웃거릴 때
잔설 사이 살그머니 나오는 저 쑥 좀 봐
새색시 발자국처럼 파릇파릇 고와라
아슴아슴 여린 손 살그머니 내밀어라
양지쪽 햇살 보고 배시시 웃는구나
파릇한 고운 미소가 봄바람을 불렀나
서럽고 차가운 냉대 온몸으로 견뎌내는
주막집 서산댁은 들녘의 쑥을 닮았네
전생이 쑥이었나 봐 언제 봐도 수수해
단정한 앞치마에 탁배기 세례를 받아도
얼굴이 멍이 들어 푸르게 쑥색 되어도
속내를 보이지 않는 수더분한 저 여자
언제나 웃고 있어도 해쑥처럼 안쓰럽고
속내를 감추어도 쑥 범벅같이 어설프다
은은한 향내가 나는 쑥차 같은 저 여자
현신불現身佛
경주 박물관 동편 화단에
나란히 앉은 목 없는 불상
석가모니가 여기 있었네
분황사 우물은 얼마나 서러웠을까
젖은 법령을 햇볕에 말리고
목이 없어 쓸쓸한 자리
반짝이는 햇빛이 내려와 설법하네
무량한 세월에 법문을 안고
목이 달아나도 우물에 수장되어도
부처는 그대로 있었네
퇴색하지 않은 극락의 목소리
아무것도 묻지 마라
세상을 탓하지 마라
그냥 자아를 찾으라
물처럼 바람처럼 나타난 부처
목 없는 석불
경주 박물관 뜰
가부좌를 틀고 줄지어 앉은
머리 없는 석불들
신비한 미소를 담은 머리는
어느 곳에 나들이를 갔는지
아는 이 없다네
피보다 진한 통곡을 삼키고 언어를 잃고
동그란 수인(手印)으로 말하네
서라벌 천 년의 역사
자비로운 미소 도둑맞아도
맨바닥에 여여如如히 앉아
사념思念의 숨결이 살아나네
눈물이여 노래여
낭랑한 독경 소리 없어도
목탁소리 없어도
한 가닥 불씨로 피 돌림 하는
도도한 강물처럼
두 손으로 그려내는 아미타
보는 이마다 합장을 하네
희망을 놓지 않았어요
바람 탓은 아니었지요
내 마음이 풍선처럼 가볍게
하늘을 올라간 탓이지요
천지개벽이 시작할 듯 광풍이 일고
수천의 얼굴을 숨긴 야차가
내 심장에 바늘을 꽂아 놓고
비릿한 피 냄새를 즐기려 해요
길고도 짧은 인생길이
줄기마다 고운 꽃만 피우겠어요
꽃을 피우려 오른 줄기가
가시뿐인 엄나무인 걸 몰랐어요
그래도
천둥과 번개가 지나가면
맑은 햇살이
질곡의 어둠을 밀어낼 거에요
희망의 새벽을 기다릴래요
백수
궁상떠는 마누라
옷고름 푸는 소리 싫어서
밤 외출을 나선다
적막한 골목에 가로등만
쓸쓸한데
갈 곳 몰라 멍청한 나
달 없는 그믐밤
화투장 달 속에 빠져본다
장땡 한번 못 잡고
속옷까지 다 털렸다
재수 옴 붙었다
싸늘한 마누라의
눈초리 같은 새벽달
가자미눈으로
냉냉冷冷하게 내려다본다.
섬 하나 품고 사는 여자
들끓는 폭풍처럼 밀려왔다
출렁이는 파도처럼 흔들리는
내 속에는
외딴 섬 하나 있네
외로워 뒤척이던 물결 달래는
붉은 동백꽃 같은
섬 하나 품고 사는 여자라네
밤새운 고뇌가 느슨하게 안개를 젖히며
화려한 무늬를 그리며 아침을 여는 바다
바다가 깨어난다
언제나 열려 있는 바다는
수평선에 젖은 잠을 풀어 놓고
낯익은 새벽을 기다리네
섬처럼 외로운 나에게
날개 하나 달아 주고 싶네
고독을 줍던 날
갈잎 끝에 대롱거리는 울음
못다 한 말 남겨두고
공허하게 미끄러지는 날
맺었던 인연들이 툭툭 떨어지는 가을
자작나무 숲에서 나는 너를 만난다
차곡차곡 쌓은 인내가 절규로 바뀌는 순간
갈색 낙엽은 유서도 없이
공중제비돌기 한 번으로 뛰어내린다
비명을 입에 문 채 툭 툭 떨어지는 고독
짧은 만남을 서러워하며
가을빛 반짝 어깨를 다독이고
들국화 몇 송이 쓸쓸한 낮은 바닥에서
나는 고독을 줍는다
그믐달의 비애
잠 못 드는 깊은 밤
그믐날 새벽녘
내 창문에 내려온 달빛
무심히 수묵화를 그린다
넓은 창에 내려온 큰 산
가부좌를 틀고 앉아
먼 하늘 별들을 불러들이고
멀리 가까이 지나가는
바람을 불러들여
묵언 수행 중인 소나무를 흔든다
밤은 깊은데
아직도 마음에 드는 구상을 못 했는지
이리저리 구도(構圖)를 바꾸는 달빛
나도 따라
데생(Dessin)을 바꾸어본다
모닝커피를 마시며
독설처럼 쓰디쓴 커피 맛
달콤한 설탕으로 위장하고
나를 유혹하는 모닝커피 한잔에
똑 속아 넘어가
아 향기 좋은데 하며 손이 간다
커피 한잔 할까
갈색 향에 매료된 현대인들
밥 한번 먹자는 말보다 쉽게 나오는 인사
커피를 갖가지 모양으로 첨삭해서
각각의 성깔을 표현하듯
제각각의 이름표를 달고 기다린다
나름대로 선택한 커피를 마시며
그윽한 향을 즐기고
누군가를 은은하게 그리워하며
악마의 유혹에 손을 내민 천사처럼
쓰디쓴 한잔의 마법에 걸린 현대인들
쓰디쓴 커피 같은 인생살이도
커피 향을 즐기듯 인생을 즐기면
그윽한 향기가 날까
여운餘韻
흰 눈이 내리면
따스한 손길이 생각난다
말없이 내 손을
그의 코트 주머니에 넣고
말없이 걷던 추억
그리움으로 남아
흰 눈 사이로 걸어오던
발걸음소리 들리는 듯
가지런한 하얀 이 드러내고
웃는 모습
잔잔한 여운만 남아
꿈속처럼 흔들린다
눈은 내리는데 풋풋한 청춘이
그때 그대로인데
아직도 심장은 뛰고 있는데
까마득한 전설이 되어가다니
행복(幸福)
아무에게도
보일 수 없는 비밀 하나 생겼어요
보고 싶고 그리울 때
나 혼자 살짝 꺼내 볼 수 있는
정 하나 숨기고 살아요
바람만 살짝 불어도
온몸에서 향기가 나는 꽃처럼
그대 생각
가슴에 품고만 있어도
화사한 복사꽃 냄새가 나요.
아무도 보는 이 없는데
그 정 하나 남몰래 꺼내보면
쿵쿵거리는 이 가슴을 아시나요
가까운 곳에 있어도
아득하게 먼 그대
가끔은 내 생각 하시나요
비밀처럼 감춘 이야기 들고
한줄기 바람으로 내게 오소서
황혼
노을처럼 곱게 지고 싶다
살아온 날 헤아려 보면
삶의 갈피마다
절절한 곡절이 묻어있다
아름답게 지는 노을 바라보며
땅끝 마을에 서서
저무는 한 생을 돌아보다가
내 生의 전부를 담아낸
붉은 문장의 부음訃音을 읽고 있다
뛰어도 뒹굴어도 다가오는
그날은 피할 수 없을 터
바르르 떨던 주먹
스스로 펴고 입적하리
달관한 듯 미소 지으며
야속한 세월호
세월아 세월아 무심한 세월아
꽃보다 아름다운 희망의 싹을 가득 실은 너
어찌 그리 경망하게도 낡은 몸으로
위험하고 험악한 맹골수로에 들었더냐
네 진정 무심한
세월을 안고 자살이라도 하려 한 게냐
수심 깊은 바다 밑 어두운 적막한 곳에
저 가여운 꽃잎들 피지도 못한 채
시들게 한 네 죄가 얼마나 큰지 아느냐
애달고 애달파
차마 입이 있어도 말을 못 하겠구나
하늘도 기막혀 통곡하며 흘리는 눈물
노란 리본 하나로
어찌 저 어린 영혼을 달래 수 있으랴
하늘이여 바다여 마음껏 노하소서
창창한 어린 싹을 수장시킨 저
야속한 세월에 벌을 주소서
별이 되고 바람이 되어
빗물인지 눈물인지 봄비가 내린다
노란 리본 적시며 하늘이 운다
푸른 꿈 미완으로 남겨두고
저 하늘에 별이 된 내 아가야
꽃피는 봄날이 이렇게 추운 줄 몰랐다
청명한 봄날 설레며
여행을 간다고 집을 나선 아가야
세 밤 자고 온다더니 열흘이 넘었구나
슬픈 그림자도 없는 캄캄한 바다를 보며
아무 데도 없는 너를 찾아 목 놓아 운다
칠흑의 깊은 수심 저승으로 가는 길로
서러운 굴레를 씌운 자 누구인가.
소쩍새의 한숨처럼
잦아드는 숨소리 너는 듣느냐
별이 되고 바람이 되어 다시 만나려나
아~ 세상아
*세월호 참사를 보고
콩나물
정갈한 제사음식으로
콩나물 다듬는데
떼어낸 발들이 그 껍질과 어울려
자꾸만 물음표를 던지며
4분음표를 그리고 쉼표를 찍는다
물만 먹고 자랐으니 심성이 착하디착하다
떼어낸 잔발들 서럽다 말하지 않고
깨끗한 음률을 만드는데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으면서
장중한 선율로 애도곡을 쓴다
뿌리 끝에 흐르던
물방울 소리 기억해 내며
미완의 교향곡을 다듬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