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회 지용 문학상 당선작]
우리집에 왜 왔니/이시하
어둠을 파고 시궁쥐 눈깔 같은 봉숭아 씨앗을 심을래요 모르는 집 창문에 애절히 피워나 모르는 그들을 울게 할래요 봉숭앗빛 뺨을 가진 어린 손톱에 고운 핏물을 묻힐래요.
우리 집에 왜왔니 왜왔니 왜왔니
꽃 찾으러 왔단다 왔단다 왔단다
서둘러야 해요 나를 통과해 가는 그대의 눈을 볼래요 너무 오래 견딘 상처는 아물지 않아요 몹시 처량해진 나는 모르는 집 창문 밑에서 울 거예요 당신을 부르며 울 때 사람들은 어두워져요
문이 닫혀요
이렇게 부질없는 이야기는 처음 해봐요 나는 늘 술래이고 아직 아무도 찾지 못해요 가위바위보가 문제에요 나는 주먹만 쥐고 있거든요 아무도 내게 악수하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아요 당신도 곧잘 숨는다는 걸 알아요 이제는 내가 숨을래요 꽃 피지 않는 계절에 오래도록 갇혀있을 거예요
우리 집에 왜왔니 왜왔니 왜왔니
꽃 찾으러 왔단다 왔단다 왔단다
봉숭아꽃이 만발했어요 보세요 정말 내가 모르는 집이에요 창문 밑에 피어난 저 붉은 봉숭아! 무슨 꽃은 봉숭아꽃이어야 해요 당신은 봉숭아꽃을 찾으러 온 거예요 나는, 나는 꽃 피지 않을 거예요
아무도 찾지 못해요 문은 열리지 않아요
[심사평]
예년과 같이 많은 작품이 전국 방방곡곡에서, 심지어 해외에서까지 날아 들었다. 응모한 253명이 보여준 1604편의 작품을 읽었다. 대개 상당한 습작기를 거쳐 일정 수준의 솜씨를 보여주고 있는 작품들이다. 그만큼 고르기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엇비슷한 언어구사와 소재 처리가 두드러져 규격화된 유행이 퍼져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개성적인 소재 처리와 말솜씨가 뚜렷한 작품을 찾으려 노력하였다. 그러나 개성을 드러내려고 작위적으로 ‘튀는’것은 눈에 거스르는 일이요 하나의 취약점이다. 또 산문과 시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고 무작정 길어지고 장황해지는 경향도 소망스러운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자기다운 시선과 목소리가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여러 응모자들의 자성과 배가되는 노력을 요청한다.
‘집 나간 비둘기를 찾습니다’(최종길)는 순진한 발상이고 어사 선택도 아주 소박하다. 그래서 허를 찌르는 독특한 매력을 발산한다. 상투성에 물들지 않은 것이 큰 장점이다. 그러나 나머지 작품들이 허약해 새 얼굴로 나서기에는 미흡하였다. ‘인사’, ‘꽃잎’,‘문래동 4가 8번지’(안경숙) 등 다섯 편도 독자적인 목소리를 보여주고 있다. 산문화 성향을 억제하고 소재의 경제적인 처리를 지향하고 있는 것도 아주 든든하게 생각된다. 또 다루고 있는 소재도 다채로운 편이어서 믿음직스럽다. 그러나 대체로 소품이어서 매우 아쉽지만 이번엔 더 정련할 시간을 주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우리 집에 왜 왔니?’‘꽃놀이 꽃놀이’등 다섯 편을 보여준 이향미 씨의 작품들은 섬세하면서도 경묘하고 신선하다. 그리고 소재처리나 언어 수사의 상투성을 피하고 있음도 잘 드러나고 있다. 또 시와 산문의 차이라는 것도 잘 분간하고 있어 믿음직스럽다. 작품에 여백을 두고 여운을 남겨주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 집에 왜 왔니’를 당선작으로 뽑았다.
당선을 축하하며 앞으로 자기 목소리가 더욱 뚜렷한 시인으로 성장하기를 기대한다.
ㅡ신경림시인, 유종호 평론가
【지용문학상 당선자 이향미씨】
“담담하게 아스러지는 물처럼 시 쓰고 싶어
“정지용 선생님 시의 이미지와 제 시의 이미지가 많이 달라 기대하지 않았었는데 이렇게 기쁜 소식을 듣다니…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아요.” 12회 지용신인문학상 당선자 이향미씨는 자못 상기된 모습이었다. 시 공부를 시작한지 3년만에 큰 상을 받게 된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당선작 ‘우리 집에 왜 왔니’는 유년 시절의 놀이에서 모티브를 얻은 시로 아련한 슬픔을 노래하고 있다.
‘우리 집에 왜 왔니’는 아이들이 두 패로 나뉘어 손을 잡고 노래를 부르며 상대편의 아이 한 명씩을 선택해 데려가는 놀이. “상대편이 다른 편의 아이를 지적 할 때 긴장하는 아이들. 불운이 나를 피해 남에게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이기적인 마음, 자신의 둥지를 떠나 다른 둥지로 가야만 하는 안타까움 등이 노래 속에 숨어 있는 것 같아 슬펐다”고 말하는 이 씨에게서 유년시절의 작은 놀이 하나도 허투루 보지 않고 의미를 부여하는 시인의 섬세함이 묻어난다. 심사위원들은 이 작품을 경묘하면서도 신선하며 작품에 여백을 두어 여운을 남겨주고 있다고 호평했다.
이 씨가 시를 쓰기 시작한 것은 3년 전부터였다. 주부로서의 삶에 대한 회의와 자아 정체성에 대한 의문이 자신의 젊은 시절을 돌아보게 했고 그것이 글을 쓰는 계기가 됐다.
이 씨는 고등학교도 갈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하고 어려웠던 시절을 보냈다. 산업체 고등학교에 들어갔지만 몸이 아파 중도에 학교를 그만뒀고 우여곡절 끝에 남들보다 2년 늦게 인문계인 철원여고에 들어가게 됐다. 그 시절에는 그저 감수성 풍부한 여고생들이 흔히 그러하듯 시를 끄적여 보았을 뿐 시인이란 직업은 감히 꿈꿔볼 수 없는 머나먼 동경의 대상이었다. 어려웠던 시절 농촌은 동생, 어머니, 아버지를 잇달아 여읜 이 씨의 아픔을 따뜻하게 보듬어주는 대지였다. 아직도 이 씨는 슬픔이나 가난 따위를 잊었던 젊은 날의 기억들에서 많은 영감을 얻고 있다고 한다.
이 씨가 본격적으로 시공부를 시작하자 처음에 가족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한 번 붙들기 시작한 시는 그를 놓아주지 않았고 이제는 누구보다도 남편 박병희 씨(44·한식조리사)와 초등학교 5학년과 2학년에 재학중인 아들, 딸이 가장 큰 지지자가 돼 주고 있다.
이 씨는 이번 상에 자만하지 않고 앞으로 문학공부를 더 열심히 할 예정이라고 한다. “인생의 깊이가 녹아있는 시, 문학적 향기가 배어있는 시를 쓰기 위해 시적 자산들을 축적하겠다”며 시작에 대한 강한 열정을 내비친다.
시를 쓰기 시작하면서 이 씨가 지은 자신의 필명은 ‘시하(翅河)’ 즉 ‘물의날개’를 의미한다. “수증기, 안개 등에서 물방울들이 날개를 달고 날아오르는 물의 날개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는 이 씨는 “시 역시 조금 모자란 듯, 비어있는 듯, 담담하게 아스러지는 물처럼 쓰고 싶다”며 소망을 밝혔다. 시상식은 지용제 행사의 일환으로 오는 13일 오전 11시 옥천군청회의실에서 열리며 500만원의 고료가 주어진다.
ㅡ2006.5.8 동양일보/조아라 기자
ㅡ발췌: 동양일보 문화면/ http://www.dynews.co.kr
ㅡ>꽃놀이, 꽃놀이 外,
>접기
꽃놀이, 꽃놀이/이시하
땅이 수런거리며 톡톡, 씨앗들을 받아 적고 있는데
제 몸 푸슬푸슬 헤쳐 부드러운 아기 씨앗 몸을 덮어 주는데
귀 쫑긋 열고 들어보면 엄마아, 부르는 소리 들리는 듯도 하고
맘마 까까, 하는 소리 들리는 듯도 하고
옹알옹알 칭얼대는 소리 들리는 듯도 한데
벚나무 밑은 문득 아가들 울음소리로 화창해지고
목련은 부쩍 자란 새끼들 흐뭇하여 의기양양하고
한발 늦게 자궁 문 연 라일락은 여린 몸들에
향기 좋은 베이비로션 바르느라 부산스러운데
엄마 맘마, 엄마 까까, 엄마 쉬야, 엄마 찌찌……
엄마 엄마 부르는 맑고 고운 소리들이
허공에 꽃 빛으로 폴폴폴 풀어지는데
하염없이 하염없이 그 소리들, 아득해지고
아득한 것들이 내려앉은 어느 땅에선
아지랑이 솔솔 피어난다는 소식, 전해도 오는데
우듬지에 물오른 나뭇가지들이 바람만 잔뜩 들어 참말 어쩌느냐고
땅속뿌리들이 한숨 푹푹 내쉬는데, 아아, 바람난 엄마들의 꽃놀이
즐거워라, 즐거워라!
某씨 이야기 /이시하
영농자금 칠십만 원 대출받아 돌아오던 某씨가 진성상회 평상에 앉아 탁주 한 사발 들이키는 게 뭐 그리 큰 잘못이겠어요? 애 셋 딸린 과부댁이 비릿한 돈에 눈멀어 자꾸만 술잔을 들이밀며 권주가를 불러 준 것이 뭐 그리 큰 잘못이겠어요? 거나하게 취한 某씨가 옜다, 기분이다, 허리춤에 찔러준 돈이 평소보다 좀 과하기로서니 그게 뭐 그리 큰 잘못이겠어요? 먹고 살려니 웃음이 조금씩 헤퍼진 과부댁이 뭐 그리 큰 잘못이겠어요? 어쩌다 호주머니 든든해져 어깨에 힘 팍 들어가고 사뭇 기분 째지는 날인데 이런 날 인심 좀 쓰는 게 뭐 그리 큰 잘못이겠어요?
흥얼흥얼 골목길 돌아 집으로 오는 길에 옆집 순돌이 녀석 귀여워 과자값도 좀 주고요, 지난 번 산불 났을 때 고생한 이장 집에는 돼지고기 두어 근 끊어다 주고요, 이태 전 막둥이 녀석 낳을 때 애 어미 산 구환 하느라 애쓴 마산 할미한테는 사탕이랑 양갱도 좀 사다드리고요 마을 청년 회관에 들러 격려나 해줄 겸 음료수 좀 나눠 주고요
늦은 밤길, 짐 자전거 뒷자리에 풀어진 돈다발 얼기설기 묶어 실은 某씨가 비척비척 돌아왔는데요 내가 참말 못살겠다, 이 정신 나간 양반아 영농자금 그까짓 거 몇 푼이나 받았다고 술 처먹고 인심 쓰고 돌아 댕기다 이제야 기어들어오나 그 돈이 우리 돈인가 다 빚이다 빚, 이 망할 양반아, 에고, 내 팔자야 내가 죽어야지 이래 어찌 살겠나…… 속 타는 한숨 소리 울 밖까지 넘쳐났는데요
한 해 두해 지나고 십년이 훌쩍 지나고요 某씨는 술병으로 내쳐 죽기 살기 용쓰다가 세상을 떴는데요 어느 날 농협에서 삼백만 원 짜리 빚 독촉장이 날아들었는데요 이게 뭐래, 이게 뭐래, 대출금 갚으라고 마련해 준 돈은 어쩌고 지금 독촉장이 온다냐, 하는 사이 어찌어찌 살던 집까지 압류가 되었는데요 공장 다니던 딸이 돌아와 집마저 없으면 엄마 혼자 어찌 살까 싶어 눈물 짤끔거리며 적금통장 깨 묵은 빛을 탕감했는데요 죽어서도 속 썩이는 인간이다, 니 애비는…… 한숨을 쉬던 딸의 어미가 모씨 뒤를 따라 그해에 목숨을 놓았다는 뭐 그런 얘기가 있는데요
某씨가 누구냐고요?
아, 그냥 심심해서 남 얘기 좀 한건데요, 누구 얘긴지가 뭐 그리 중요한가요?
아다, 아다 /이시하
길을 지날 때 엄마는 혀들을 밟곤 해요
긴 혀들이 긴 긴 혀를 자랑하느라 길을 비켜주지 않아요
휘감긴 혀들을 풀다보면 빙빙빙, 엄마는 어지러워요
술 취한 기인 혀들은 너그럽기도 해서
형편없는 엄마의 혀를 용서하기도 하죠
즈려밟은 혀들이 꿈속에 나타나요
몸을 휘감고 목을 조여 와요
눈을 뜨면 입 안이 소태라서 간밤 꿈을 게워내지요
어러러러러, 토해낸 꿈들이 우굴 우굴 몰려나가요
시계는 아침을 가리키지만 아직은 아니에요
오후 세 시, 진짜 아침은 그때야 오죠
햇살을 기다려요
해는 긴 혀들의 집에 먼저 가야 한대요
17층 26층 34층 57층……
햇살이 몇 가닥 남지 않았어요
부러진 햇살이라도 전 괜찮아요
꽃밭과 참새와 구름을 다 그려놓고
해님을 기다리고 있어요
잠시만, 아주 잠시만 들려주세요
허공을 휘저으며 말을 하지요
엄마는 왜 말을 못해?
왜 맨날 같은 말만 해?
반짝,
환한 실타래 한 묶음 쪽방 창문으로 떨어져요
허공을 젓던 손이 잽싸게 햇살을 집어 들어요
아다, 아다, 아다!
많은 말을 배우지 않아도 좋은 시간이에요
아다는 창문이고 아다는 햇살이고 아다는 우리 엄마거든요.
거꾸로 크다 /이시하
내리 딸이었습니다
현명한 할머니께서 나를 윗목에 엎어놓으셨습니다
고단한 엄마는 아마도 잠이 드셨을 것입니다
당연한 일이란 듯 나는 울지 않았고
그리고 죽지도 않았습니다
순해서 나는 키워졌습니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습니다
주는 대로 먹고, 자고, 자라났습니다
아무도 내 존재를 심각해하지 않았습니다
심각하다는 걸 눈치 챈 건 바로 나였습니다
모든 사물이 내게 말을 건다고 믿었으니까요
순해서 나는 또 키워졌습니다
예술이니 사랑이니 하는 따위들은 안중에 없었습니다
하루 몫의 생산량을 해내는 것에 몰두할 뿐이었습니다
단순한 삶이어서 단순하게 행복했습니다
나는 잘 자라났습니다
하늘이 아닌 바닥 쪽으로만 자라갔습니다
순해서 나는 자꾸 커갔습니다
바닥에 텅, 발바닥 닿는 소리 들렸습니다
아무하고라도 같이 살아야겠단 생각을 했습니다
쓸쓸해서가 아니라 무서웠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무서워 사람하고 살고 싶었습니다
나는 잘 길들여져 갔습니다
순해서 나는 자꾸자꾸 커갔습니다
내가 나를 엎어놓습니다
엎드려 뽕잎만 갉아먹고 있습니다
나비도 매미도 다 날아갔습니다
날개 펴는 법을 잊은 나만 남았습니다
날개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순해서 나는 너무 잘 큽니다.
'신춘문예'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07년 신춘문예 시 당선작(경향신문) (0) | 2007.01.06 |
---|---|
천원역 (0) | 2006.12.20 |
거미집 (0) | 2006.01.04 |
탑 ㅡ 조영수 (0) | 2006.01.02 |
개기월식 ㅡ 곽은영 (0) | 2006.01.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