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의香氣

판쇠의 쓸개 //정양

湖月, 2006. 9. 9. 05:27

판쇠의 쓸개 / 정양

 

 

천생원네 머슴 하판쇠

덫에 걸린 멧돼지 배를 가르다가

주인영감 잡수실 쓸개를 제 입에 꿀꺽 집어삼키고

경상도 상주 어디서 새경도 못 받고 쫓겨온 노총각

 

나락섬을 머리 위로 훌쩍훌쩍 내던질 만큼

진창에 빠진 구루마도 혼자

덜컥덜컥 들어올릴 만큼 힘은 세지만

씨름판에서는 마구잡이로 밀어만 부치다가

번번이 제풀에 나뒹구는 바봅니다

 

멧돼지 쓸개를 따먹어서

판쇠는 쓸개 빠진 짓만 골라 합니다

조무래기들과 어울려 팽이 치다가

남의 논밭에서 일해주다가

주막에서 남의 술값이나 물어주다가

천생원에게 멱살 잡혀 끌려가는 게

한두 번이 아닙니다

 

새경 받고 솜리 장에 가서

제일 먼저 까만 금테 라이방을 샀다는데

동네 아낙들이 멋쟁이라고 추켜준 뒤로는

밤에도 그걸 걸치고만 다닙니다

 

천생원이 만경 사는 형님에게 생일선물 보내려고

내일 새보그 맹경 좀 가따 와야 쓰거따 일러놓고

이튿날 새벽 판쇠를 아무리 찾아도 없더니

아침밥상 물린 뒤에야 라이방 걸친 판쇠가 나타나더랍니다

 

너 시방 어디서 오냐?

맹경 가따가 오는 기리고마니라우

맹경은 머더러 가떠라냐?

어저끄 가따 오라고 혀짜너유?

가따가 오란다고 그냥 빈소느로 가씨야?

아 글씨 가따가 오라고 혀짜너유?

그렁게 맹경은 가서 뭐시라고 현느냐 그 마리여?

가따가 오라고 혀서 와따고 혀찌라우

그렁게 머시라고 허시대?

그냥 우슴시나 인절미 한 소쿠리 주시던디유

아치믄 머건냐?

인절미 머금서 와꾸마니라우

그 인절미를 니가 다 머거씨야?

먹다봉게 그렇게 되야꾸만이라우

 

하이고 이 쓸개 빠진 노마 인자는 나도

쓸개가 다 빠져뿌런능갑나

캐묻다 지친 천생원이 어이없어 웃는 동안

판쇠도 덩달아 라이방을 벗고

눈물을 찍어가며 웃었습니다

 

 

- 약력: 1942년 전북 김제 출생. 1968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197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평론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까마귀떼] [수수깡을 씹으며] [빈집의 꿈] [살아 있는 것들의 무게] [눈 내리는 마을] [길을 잃고 싶을 때가 많았다] 등이 있으며, 제9회 모악문학상 제1회 아름다운 작가상 제7회 백석문학상을 수상했다.

 

- 출처: 정양 시선집 [나그네는 지금도] 중에서_ 생각의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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