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행덕 시 세계

휴머니즘, 혹은 존재론적 성찰/양영길

湖月, 2013. 8. 29. 10:31

 

 

 

 

휴머니즘, 혹은 존재론적 성찰

- 안행덕의 시세계

                                                                                                                      양영길 (문학평론가)



I. 들머리


우리들의 마음속에 맺혀 있는 한()과 그 근원을 알 수 없는 그리움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이러한 한과 그리움을 하나로 보고 정한(情恨)이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정한은 그리움과 한이 쉽게 분리되지 않는 것 같다. 분리되어 있는 것 같으면서도 늘 미분 상태로 남아 있는 것은 아닐까.

애틋한 정도 많고 한스러운 일도 많은 것이 삶의 역정이기도 하다. 그래서 힘들고 아픈 일을 많이 겪으면 우리들의 심성이 한결 섬세하여지고 사물에 대하여 느끼는 정감도이 풍부해진다고 한다. 쓰리고 아픈 일들을 많이 겪으면서 사물과 세태에 대하여 연민의 정이 많아지고, 여리고 풍부한 감수성이 길러진다는 것이다. 시인들의 이러한 섬세하고 풍부한 감수성은 우리들에게 사물과 세태의 정황을 보다 넓고 깊게 공감할 수 있게 해 주고 따뜻한 인간미를 엿보게 해 준다.

안행덕 시인의 시에서도 이러한 섬세하고 풍부한 감수성을 통해 따듯한 인간미를 엿볼 수 있다. 즉 과거 지향적인 '그리움 - 설움 - 한'이 서로 분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시인의 주된 정서로 자리하면서 깊이 공감할 수 있게 만들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안 시인의 시 작품을 읽다보면, 그 심성이 남다름을 엿볼 수 있다. 자신의 아픔과 설움에 비추어서 남의 아픔과 설움에 대하여도 따뜻하고 자상한 마음을 갖춘 것 같은 안 시인. 남의 심성에도 깊이 공감할 수 있는 풍부한 감수성을 지닌 시인인 것 같다. 안 시인은 아픔과 설움을 넓고 깊이 공감하면서 휴머니즘, 혹은 존재론적 성찰의 지평을 열어나가고 있다.


2. 정한 또는 정감


한(恨)은 정(情)으로 통하는 것일까. 안 시인의 시에는 율(律)의 깊이만큼 한도 깊고 정감도 깊다. 사물에 연민의 정을 느끼고 마음 아파하는 것처럼 정한을 노래하는 사람은 어질다고 한다. 한이 많다는 것이 아니라 정감이 많다’, 정감이 여리다는 것일까. 안 시인은 정이 많고 정에 약한 사람일 것 같다. 섭섭하여 잊지 못하는 마음이 넘쳐나고 있다.

안 시인은 가슴에 사무친 한을 강 같은 나이를 아시나요(「강」)와 같은 존재 의미의 물음으로 제기하고 있다. 이러한 존재론적 물음을 통해 삶의 넓이를 측량해 가는 서정적 자아의 사유가 시인으로

하여금 동의하고 추구하는 서술어로의 전환을 통해 표상하고자 하는 주어를 해명해 나가고 있다.

「강」을 살펴보면 그 서술어를 짐작할 수 있는 것 같다.


강 같은 나이를 아시나요.

쉼 없이 깎이고도 참

편안히 흐릅니다 그려,

모난 돌에 할퀴고 벼랑에 부딪혀

퍼렇게 멍이 들어도

그 아픔이 참을 수 없어 몸을 뒤틀며

그래도 쉼 없이 가야 하는 길

잊혀갈 세월 서러워

잘게 부서지는 푸른 신음이

햇볕에 그을려 눈이 부시다

글썽이는 눈망울 같은

울먹임이 물비늘 되어 반짝일 때

세월의 아픔을 안고도 처연히 흐르는 강물

저 같은 속 깊은 가슴이 되고 싶다.

눈부시도록 아름답게 비워 내고 싶다

흐르는 세월처럼 처연해도

아무도 몰라주는 나이

속 깊은 저 강물의 나이를 아시나요

-「강」전문


모난 돌에 할퀴고 벼랑에 부딪혀 / 퍼렇게 멍이 들듯 맺혔던 한도 잊혀갈 세월 서러워 / 잘게 부서지는 푸른 신음이 / 햇볕에 그을려 눈이 부시듯 서서히 풀리고 있다. 그래서 시인은 세월의 아픔을 안고도 처연히 흐르는 강물 / 저 같은 속 깊은 가슴이 되고 싶다. / 눈부시도록 아름답게 비워 내고 싶다라고 소망하고 있다. 아무도 몰라주는 나이 / 속 깊은 저 강물의 나이인 것이다. 즉, 흐르는 세월처럼 처연한 나이는 맺혔던 한을 삭여 내어 햇볕에 그을려 눈이 부신 나이에 와서야  울먹임이 물비늘 되어 반짝이는 것처럼 아름답게 승화되고 있다.

이러한 사유의 깊이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우리들의 서술어는 사유에 의해서 거듭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는 가운데 또 하나의 사유를 숙성시키면서 정신을 가다듬게 된다고나 할까. 시인들은 그 사유의 정점에 시적문법이 있기도 하다. 시적문법의 서술어에 시인의 사유가 얼마나 깃들어 있느냐에 따라 작품의 무게와 삶의 무게를 가늠할 수도 있는 것이다.

 

안 시인은 이러한 삶의 무게를「장구소리」에 담아내고 있다.


제 몸 하나 추스르지 못함을 훈계하려고

날아든 북채에, 내지르는 외마디 비명

숲으로 들어간 사막의 모래 바람 소리다

어미가 북채의 밥이 된 줄 모르는

송아지는 행복한 꿈을 푸른 풀밭에 심는다

찢기고 피멍 든 상처 품 안에 감싸 안고

고려 때부터 내지르는 절규이다.

덩더꿍 덩덩 신명나는 소리 속에

오동나무 전설이 담기면

감추었던 슬픔이 언뜻 피어오르고

안개꽃 같은 슬픔을 날려 보내려

댓가지 북채에 힘을 더해 장단을 맞춰본다

제 신명 풀어내려 내려치는 한 서린 장단에

어미는 이를 악물고 아픔을 참고 속으로 울다

기어이 터지고 마는 신음 소리 덩더꿍 덩덩

-「장구 소리」전문


안 시인은 덩더꿍 덩덩 신명나는 소리 속에 / 오동나무 전설이 담기면 / 감추었던 슬픔이 언뜻 피어오르고 / 안개꽃 같은 슬픔을 날려 보내려 / 댓가지 북채에 힘을 더해 장단을 맞춰 보고 있다. 이 장단은 찢기고 피멍 든 상처 품 안에 감싸 안고”, 제 신명 풀어내려 내려치는 한 서린 장단이기도 하고, 이를 악물고 아픔을 참고 속으로 울다 / 기어이 터지고 마는 신음 소리이기도 하고, 제 몸 하나 추스르지 못함을 훈계하려고 / 날아든 북채에, 내지르는 외마디 비명이기도 하다.

이는 그리움과 한의 정서에서 극복의 정서로 승화하고자 하는 몸부림이기도 하다. 현재 시점에서는 극복의 정서를 지향하게 마련이지만 시의 행간마다 아픔이 묻어 있다. 다음의「욕망」을 보면, 그 아픔의 근원을 가늠할 수 있을 것 같다.


도로가에 비둘기 한 마리가 날아오를 듯 퍼덕이다

그대로 주저앉는다. 허공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는 저

가여운 날개 언제나처럼 짝을 그리워하다

지친 작은 심장이 분홍빛 별들에 잠긴다.

봄이 오는 골목의 나른함이 내 어깨에 입맞춤하는

숨소리 들리고 별빛처럼 떨어진 비둘기 대신 내가 날

고 싶다.

벤치 난간에 올라 살짝 두 발을 모으고 날아갈 자세를 취해본다

날치를 기억해 낸 바다처럼 밀려오는 욕망이 뜨겁다

내 겨드랑이에 숨겨둔 나만의 날개가

오늘도 자꾸만 날 간질이고 있다

-「욕망」전문


안 시인에게 욕망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것은 허공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는 저 가여운 날개로 표상되고 있다. 그 날개는 창공을 마음대로 나르던 날개 고이 접어 / 흘러가는 세월에 묻고(「솟대」) 별빛처럼 떨어진 비둘기 대신(「욕망」) 더 멀리 보고 싶고 더 높이 날고 싶어서 / 고단한 네 날개에 한 줌 소망을 얹어 놓고(「솟대」) 날아갈 자세를 취해(「욕망」) 보고 있다. 가슴에 박힌 불꽃 재가 되기 전에(「재가 되기 전에」) 내 가슴에 용암처럼 들끓는 언어들 / 하나씩 꽃등처럼 내어 걸(「재가 되기 전에」)듯 날고 싶은 것이 서정적 자아의 욕망인 것 같다.

그러나 안 시인에게 있어 영원히 풀 수 없는 정한, 그 채울 수 없는 욕망의 공백을 어이할까. 정감의 닫힘과 열림, 그리고 열림과 닫힘의 구조 속에서 한을 삭이는 안 시인의 시세계는 한과 그리움의 닫혀 있는 정서를 열어나가려는 지향성을 담아내고 있다.


3. 사유의 깊이 또는 서술어


 

시(詩) 한 편 한 편은 그 시인의 마음이자 표정이다. 마음과 표정에는 사유의 깊이가 숨 쉬고 있다. 한 편의 시를 악기로 볼 때 악기를 연주하는 악보는 시인의 마음이요 표정은 연주자라고 할 것이다.


악보에 맞는 연주가 들을만한 음악이 되는 것처럼 시를 구성하는 일련의 의미망들이 구조적으로 일관성을 기해야 함은 물론이다.


이러한 사유의 깊이를 ‘물’의 심적 현상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물의 심적 현상은 어떤 의미가 담겨 있을까. 흔히 인생 역정을 흐르는 강물로 비유하기도 한다. 그래서일까


안 시인은 강물을 통해 지금 어디로 가는지”, 갈 길이 얼마인지를 물어보고 있다. 그 만큼 사유의 서술어가 넓다는 것일까.

 

지금 어디로 가는지 나는 모른다

겨울이 가면 봄이 오고

봄이 오면 꽃이 피듯이

세월 따라 그렇게 피고 질 테지


갈 길이 얼마인지 나는 모른다

흘러가는 강물처럼 앞서거니 뒤서거니

무심한 세월 따라가고 있을 뿐


흐르는 강물처럼

바위를 만나면 돌아가고

벼랑을 만나면 겁 없이 뛰어내리고


그렇게 영원한 바다를 그리며

영영 모를 심연을 찾아

오늘도 쉼 없이 강물처럼 흘러간다.

-「강물처럼」전문


그 서술어는 겨울이 가면 봄이 오고 / 봄이 오면 꽃이 피듯이 / 세월 따라 그렇게 피고 지듯이, 흘러가는 강물처럼 앞서거니 뒤서거니 / 무심한 세월 따라가고 있을 뿐이다. 영영 모를 심연을 찾아 / 오늘도 쉼 없이 강물처럼 흘러 가면서 흐르는 강물처럼 / 바위를 만나면 돌아가고 / 벼랑을 만나면 겁 없이 뛰어내리고 있다. 안 시인의 강물 따라 흐름은 선(善)의 실체이기도 하고 세척의 은유이기도 하다.

서정시의 본질이 객관적 세계의 주관화에 있다면, 이 작품의 시적 자아는 객관화된 강물을 자기만의 주관적 내면 공간에 용해시킴으로써 시인의 정감을 접목시켜 시정(詩情)을 얻어내고 있다. 

이러한 시정은 달맞이꽃처럼 슬픈 사랑”, 섬 같은 그리움”, 애타는 기다림마중가고 싶어 하고 있다.


마중 가고 싶다

누구를 마중 간다는 것은

풍선이 하늘을 나는 것 같겠지

그리움이 간절해지는 내 영혼 위로

달맞이꽃처럼 슬픈 사랑이 운다.


마중 가고 싶다

누구를 기다린다는 것은

마음 설레는 행복이지

울음이 들어 있는 허기진 내 영혼 위로

섬 같은 그리움이 지나간다


마중 가고 싶다

허기진 정 때문에 세상이 텅 빈 듯하다

애타는 기다림에 목이 마른다

갈증을 풀어 줄 환한 물소리

마중물 되어주면 눈물 나겠지

-「마중물」전문


이러한 마중에 대한 갈증은 어디 오는 것일까. 지난날들이 파노라마로 흐르고 / 흐르는 꽃잎은 무겁게 내려앉으면, 꿈인 듯 눈감으면 아득한 항로에서 사념(思念)의 불꽃(「갈증」)같은 것일까. 그리움이 간절해지는 내 영혼 위로”, 울음이 들어 있는 허기진 내 영혼 위로”, 정 때문에 세상이 텅 빈 듯 다가와 전신에 전류처럼 역류할 때 허공에 슬픔을 찢고 가냘픈 두 손으로 합장(合掌)하는 간절한 성정을 담아내고 있다.

안 시인의 삶의 무게가 얼마나 깊은 사유 속에 있는 지를 보여주고 있다.

또 형이상학적 사유처럼 시원적인 것으로서의 존재 진리를 찾고 있는 서정적 자아의 사유는 어떻게 표현될 수 있을까.

안 시인의 시에서 들려오는 음악은 설움의 영혼을 달래주는 정한의 깊숙한 곳으로부터 나오는 해원의 노래처럼 들려온다.


냇물 따라 구르다 멈춘 맨살 하나

말없이 그저 그렇게 무심한 듯 서있네

켜켜이 쌓인 사연 역사처럼 적어놓은

알몸을 말없이 드러내놓고

아무도 듣지 못할 소리를 속에서만 지르고

그렇게 깨어져도 흘릴 피도 없는 것을

빛나는 삶은커녕 은근한 사랑 한 번 못 해보고

치열한 전생(全生)을 구르다

깨어지는 아픔만 알게 되었구나.

-「돌」전문


안 시인은 자신의 유전(流轉 : 흘러 떠돌아다님)을 로 표상하고 있다. 그것은 냇물 따라 구르다 멈춘 맨살이자, 켜켜이 쌓인 사연 역사처럼 적어놓은 / 알몸이면서 아무도 듣지 못할 소리를 속에서만 지르면서 구르다 깨어지는 아픔의 역사라 할 것이다. 이러한 아픔은 세월이 잘라낸 아픈 상처(「옹이」)로 남아 내 가슴에 옹이(「옹이」)가 되고 있기도 하다.

천 년 만 년을 살았을 한 개 을 통해, 백 년도 못 사는 인간의 존재 의미에 대한 사유의 깊이와 넓이를 펼쳐 보이고 있다. 삶의 무게에 담겨 있는 서술어가 제자리를 찾은 명석(名石)처럼 모양과 빛깔을 통해 우리들을 공감하게 한다.


4. 또 다른 시원(始原)


우리들은 사유행위를 통해 자기 조정을 하고 자기를 의심하면서 책망하기도 한다. 이러한 사유를 통해서 시인들은 시적 대상을 표상하고, 지각하고, 판단하고, 동의하고, 거절하고, 또한 사랑하고, 미워하고, 추구하면서 사유의 넓이를 더욱 넓혀 나가면서 삶의 또 다른 시원을 열어나가게 된다.

시인들의 이러한 존재론적 물음은 시원적 사유로부터 시작하여 또 다른 시원을 향하는 것이다. 이러한 또 다른 시원에 안 시인의 따뜻한 인간미가 짙게 배어 있다.


오늘 기장 미역 한 단 사서

베란다에 널었다


물큰 깊은 바다 해초 향에 눈을 감았더니

부르지 않은 바다가 밀려온다


쏴-쏴- 처얼 썩

해안선 가득한 몽돌들이 구르고


햇살은 어느새 해당화 꽃잎 흔들며

내 어깨 위로 오른다


꿈속의 바다 한 사발

고봉으로 퍼 담아


고운 햇살 함께

홀로 되신 영천 시()누이에게 보내야겠다.

-「바다 한 사발」전문


바다 한 사발을 통해 추억가족을 떠올리는 안 시인. 이 작품을 읽다보면 시인이 얼마나 따뜻한 인간미를 지녔는가를 엿볼 수 있다. 시인이 살아왔던 시대 인식 수준과 시적 감수성을 충분히 짐작하게 해 주는 작품이다.


안 행덕 시인의 시는 다소 유별난 감이 있다.

짧은 제목을 바탕으로 이를 풀이해내려는 것처럼 표현하면서 사물들을 자아화하고 있다. 그래서 언뜻 보면 설명의 나열같은 느낌이 들고 마무리가 시적으로 승화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행간을 좀더 자세히 뜯어보면 모든 소재와 제재가 자아화의 과정을 거처 시대적 아픔으로 승화되고 있음을 엿볼 수 있게 해 주고 있다. 그냥 아픈 추억으로 치부할 수 없는 시인의 따뜻한 인간미를 엿볼 수 있게 해 준다.

또 그의 시 행간에는 ’, 옹이’, 상처’, 아픔’, 비명 등 한(恨)과 관련된 언어들이 자주 나온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개인의 비애와 한을 넘어서 시대의 아픔을 토로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뒤돌아보는 성찰의 계기를 만들어 내고 있다.

안행덕 시인의 서술어를 통해 따뜻한 인간미와 존재론적 물음을 엿볼 수 있었다.

                                                                                             

                                                                                                               제주에서      양영길

 

 

 

 

양영길(시인, 문학 평론가)

 

제주대학 대학원 국문과 (문학 박사)

199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2004년 월간 수주문학 평론부분 신인상 수상

제주도 독서교육 연구회 회장 

영주 어문학회 부회장 

시집 < 바람의 땅에 서서>

5인 공저시집 <세상이 아름 다운 이유>

논문집<한국 문학사 인식 어떻게 할 것인가>

문학 강좌<84가지 문학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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