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의香氣

계간 2015년 미래시학 여름호 신인문학상 당선작

湖月, 2015. 7. 9. 14:39

계간『미래시학』 2015년 여름호 <신인 문학상> 당선작

 

박정혜 - 화문(畵文) 외 2편

서문기 - 늙은 독수리 외 2편

 

 

화문(畵文) 외 2편

       - 향수(鄕愁)

박정혜

 

 

그때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 닥치면

이름 하나 툭 벗어 던져놓고

깊은 통로를 찾아

흙 속을 비집고 들어갈 것이네

그 뒤를 따라 생전의 것들은

산산이 흩어지거나 불태워질 것이네

아무 것도 아쉬울 것 없는 곳에서

아직 무거운 짐을 이고 가는 걸음을 위해

휘파람을 불 것이네 때때로

감은 눈썹 사이로 환한 입김을 불어 넣으면

간밤 꿈속에서 그들은

오랜만에 끊어진 소식을 주고받을 것이네

이때

정수리 중의 정수리

가장 날카롭고 뾰족한 원의 중심점이

하늘자락과 맞닿는 찰나,

들리지 않는 엄청난 소리가

눈부시게 피어오를 것이네

 

이 향기를 그리워하며 한평생 살아왔음을

그때, 겨우 알게 될 것이네

*화문(畵文) - 碧江 류창희 화백 그림에 붙이는 글

 

 

화문(畵文)

                          —숲

  그 숲으로 가려면 바람이 만든 천 개의 계단과 주름지고 투박한 세월의 손등을 타고 가야하지요 숨죽여 울었을 강과 디딜 자리 하나 없는 돌산과 도사리고 있다가 끝끝내 할퀴던 가시덤불을 넘어가야 하지요 그 숲으로 가려면 포효하는 바다를 가로질러야하지요 이물에는 별빛을 바짝 올리고 고물에는 달빛을 잔뜩 매달고 노을로 만든 돛에 얼룩진 가슴을 묻고 마냥 가야만 하지요 흉하게 일그러진 파도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물거품을 한 움큼 떠 입술에 대고 속삭여야하지요 그 숲으로 가려면 주섬주섬 껴입은 옷이 헐렁거리고 밑단에 발이 걸려 자꾸 넘어지더라도 벗지 말아야 해요 그렇게 가다가다 보면 모든 소용돌이가 소용없어지고 태어나기 이전의 조용한 나와 기막힌 조응을 하게 되는 그곳 나무 하나 없는 숲으로 들어서게 되지요

 

바람 탑

  언덕 언저리에 얼굴을 비비는 바람을 따라왔어요 양떼 같은 순한 구름이 유리조각처럼 흩어지고 있네요 팽나무가 팽팽팽 고개를 요리조리 돌리며 잎맥을 부풀리고 있지요 등을 어루만지던 햇살의 따귀를 후려치는 바람 좀 보세요 시시각각 눈을 코에 입을 귀에 귀를 손에 옮겨 붙이고 공기를 갈가리 찢고 있네요 바람을 달래는 일은 오직 바람만이 할 수 있지요 한 바람이 다른 바람을 껴안고 있네요 바람이 바람을 불러 들여 바람 위에 바람이 바람 아래 바람이 깔려 층층 탑을 쌓고 있어요 그때 바람은 오래되고 촉촉한 약속의 노래를 슬며시 풀어놓게 되지요

 

 

박정혜 시인

경북대 문학치료학과 박사 수료

(현) 전주대학교 외래교수

심상 시치료사 ​

 

늙은 독수리 외 2편

서문기

창고 구석에 박힌 재봉틀

먼지 닦고 숨구멍마다 기름 넣고 바퀴를 돌리자

푸드덕 날개를 친다

이내 굶주린 허기를 채우려는 듯

드르륵, 드르륵 날개를 켜 비상한다

겨울들판을 가로질러

빙빙 맴돌다 먹이를 발견하는 순간, 돌격

내리꽂은 곳, 아지랑이 피어오른 시냇물 속

부리를 힘껏 조여 파닥거리는 밑실을 올려 챈다

줄줄이 끌려오는 겨우내 얼었다 풀린 풍경소리

팥배나무 뿌리 돌아 바위틈 낮은 이끼를 깨우며 졸졸졸

박음질되어 오른다

돌개바람으로 흔들리는 삶의 자락 노루발톱으로 움켜쥐고

바람을 맞닥트려 바람을 탄다

늘였다 줄였다 해진 난간 굳은살 오른 부리로

한 땀 한 땀 살아온 날들, 바늘에도 호수가 있다

얇은 꽃 살도 살다보면 두꺼운 청지 같아

두꺼워진 절망의 시접에 바늘을 바꾸지 못해

뜯어낸 실밥 같은 눈이 내린다

낡은 부리 바위에 쳐서 부러뜨린 독수리처럼

툭 부러진 미싱 바늘 날을 세운다

얼어서 깨진 밤하늘, 보름달에 덧단을 대고 콕콕콕

늦도록 기워나가는 옷 수선집 아저씨

창고 안에 달빛이 환하다

 

 

초록 현무암

태고의 지층으로 스며든 물방울

황금폭포 지나 동굴의 마지막 천당성벽을 뚫고

0.1mm씩 자라는 핏물 같은 종유석,

썩을 년, 제 심장 타오르고도 부족해

혓바닥까지 떨구고 불을 지르는 것 좀 봐

가슴 도려내는 아픔에 겨운 동백 아가씨,

젓가락 피멍 들도록 펑펑 두들겨댄 흔적

태인도 달빛여린 가슴에 밀물 썰물로 드나들어

풍장소리 울려주던 그 뱃놈

갯벌에 춘삼월 심어주고 핑 댕겨 온다더니

애먼 잎사귀만 짙푸르네

어라! 동박새 놈 사설에나 어울려 볼거나

팽팽한 시절 섬 마을 찾아든 춘희년, 반평생

뱃고동 기척에도 놀라 깬 마음 굳어가고

별빛 숭숭 뚫린 골다공증 밤하늘같이

가슴패기 구멍마다 피었다, 떨어진 무거운 눈물, 행여

찾아왔다 돌아선 발부리에라도 걸리고 싶은데

무심한 겨울바람만 스쳐가고

 

분갈이

몇 해 전 사별로 재혼을 했다는 김씨

두어 달 만에 아문 상처에 새순이 올라와

제법 몇 달을 잘 넘기더니

뿌리의 '빚'이 옹기 밖으로 노출 된 것을 몰랐다고

기후와 토질이 달랐던 것 같다고

썩은 뿌리가 종기처럼 불거졌다

이걸 어쩌나, 잔뿌리는커녕 호적도 실리기 전

가족사항은 또 어떻게 적을까 망설이다

동그라미 그 동그라미를 굴려야 되나 말아야 되나 연필 끝이

가위표를 치고 동그라미 하나를 감쌌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그늘진 이력

‘연락드리겠습니다.’

볼 일 없다는 듯 회사가 싹둑 자른 한 마디

뒤통수에 받아 적은 구두체가 삐뚤삐뚤 걸어 나온다

황사 섞인 노란 하늘

은행나무 가로수길 축 늘어진 여름, 통풍의 기미는 없고

김씨의 꿈 아래, 아래로

푸른 잎사귀 하나 떨어진다

요 며칠 남향을 했다던 일기예보에선

또 무슨 병폐를 심사하고자 했던가

아직 웃자란 잎은 파란데

 

서문기 ​시인

 

2008년 8월 중앙일보 시조백일장 차상

​2009년 2월 중앙일보 시조백일장 차상

제10회, 11회 가람 이병기 시조시인 추모 전국 시조현상공모 차하 ​

 

 

심사평

 

삶과 죽음의 거리를 탐색하는 신인들

  이번『미래시학』여름호에 응모한 사람은 총 53명이었다. 많은 응모작 중에 낭중지추(囊中之錐)를 찾는 일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숨길 수 없는 재능은 드러나기 마련이다. 눈길을 끄는 작품은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마지막까지 남은 작품은「화문(畵文)」외 6편을 보내온 박정혜와「늙은 독수리」외 4편 을 응모한 서문기의 작품이었다.

 

  박정혜가 집중한 것은 ‘삶과 죽음’이다.「화문(畵文)」에서는 밀착된 ‘삶과 죽음의 거리’를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다.「화문(畵文) —숲」에서도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 역시 거친 세상을 건너 맨손으로 태초의 나라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천개의 계단을 건너 세상을 무사히 건너도 마지막지점은 결국 ‘저쪽의 나라’인 것이다.「바람 탑」에서도 ‘허무’라는 통일된 주제를 보여준다. ‘바람’으로 탑을 쌓으려는 어리석은 인간의 모습을 잘 그려내고 있다. 박정혜는 언어의 공법이 자유롭고 활달하다. 무거운 표정을 짓지 않고도 비중 있는 무게를 다루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박정혜의 작품은 보이지 않는 것을 탐색하는 끈질긴 시선과 절박한 삶을 표출한 섬세한 시적 통찰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늙은 독수리」외 4편을 응모한 서문기는 체득에서 우러나온 경험을 바탕으로 이 시대의 문제점을 잘 짚어내고 있다. 곡진한 삶이 곳곳에 배어있는「늙은 독수리」는 수선집의 낡은 재봉틀과 함께 일생을 보낸 사내의 절망이 잘 녹아있다. 모처럼 날개를 켜 비상하는 재봉틀과 넘을 수 없는 현실의 벽에 부리를 짓찧어도 결코 새 부리와 날개를 얻지 못한 사내의 절망이 절묘하게 어우러진다.「초록 현무암」에서도 현무암의 특징과 섬에 갇힌 한 여자의 상처를 질펀하게 다루었고 한 가정을 다시 이루는 것을 ‘분갈이’에 비유한「분갈이」에서도 이 시대의 화두인 ‘재혼’과 그에 따른 문제점을 신랄하게 지적하고 있다. 서문기의 작품은 주변에서 흔히 보아온 소재를 다루었지만 그의 시선은 예사롭지 않다는 점에서 높이 살만하다.

 

  당선자 두 사람은 언어의 질감이 다른 만큼 각자의 개성 또한 확연하다. 앞으로 태어날 작품은 또 어떤 모습일지 자못 기대가 된다. 당선은 시작이고 첫걸음이니 쉬지 않고 노력하여 더 좋은 작품을 보여주기를 바란다.

 

심사위원 마경덕(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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