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 사원 / 박동진
바위산 꼭대기
푸른 숲 울타리 삼아 우뚝 솟은 사원
열린 듯 닫힌 문틈으로
누구의 헌화일까
제단에 놓인 동백꽃 송이 타는 듯 붉다
오체투지, 먼 길 걸어와
마침내 사원 앞에 선 맨발의 수행자
색 바랜 장삼에 가려진 상처
화농 가득한데
아픈 발 질질 끌며
산꼭대기까지 올라온 저이는
아무런 기척 없는 허공계단 끝에서
무얼 깨달았을까
어려워라!
신기루처럼 나타났다 사라지곤 하는 꽃밭
아무래도 삭히지 못할 열꽃들
와르르 절벽 아래로 뛰어내리네
시집 <유배일기> 생각나눔. 2015
붉은 동백 / 문태준
신라의 여승 설요는 꽃 피어 봄마음 이리 설레 환속했다는데
나도 봄날에는 작은 절 풍경에 갇혀 우는 눈먼 물고기이고 싶더라
쩌렁쩌렁 해빙하는 저수지처럼 그렇게 큰 소리는 아니어도
봄밤에는 숨죽이듯 갇혀 울고 싶더라
먼발치서 한 사람을 공양하는 무정한 불목하니로 살아도
봄날에는 사랑이 살짝 들키기도 해서
절마당에 핀 동백처럼 붉은 뺨이고 싶더라
시집 <맨발> 창비. 2004
동백꽃 / 윤진화
오필리어가 간다 육자배기 가락 시끄러운 막걸리 집에서 젊은 시인과 잔 치던 목 쉰 년이 간다 칼춤 추던 사내에게 두들겨 맞은 뺨 벌그레하던 년이 간다 멍든 젖가슴 부끄러운지 모르고 자꾸 열어 보여주던 그 년이 간다 칼등에 날세워 자른 듯 제 목숨 달린 모가지 툭. 깨끗이 저버린 독한 년, 땅에 고꾸라져서야 툭. 외마디 뱉어내던 질긴 년, 冬 - 冬 발 구르며 붙잡는 생을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꽃잎 벌려 웃으며 간다 노란 중심 발기한 몹쓸 년이 저기, 저어기,
...... 시끄러워라, 동백,
시집 <우리의 야생 소녀> 문학동네.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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