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표작

술독은 놓고 가시구려

湖月, 2011. 9. 6. 22:15

 

 

 

 

 

술독은 놓고 가시구려 / 안행덕



부여케 피어나는 저녁 어스름

골목의 부산함도 사라진 시간

주정뱅이 장씨네 지붕 위, 흰옷 한 벌

술에 말린 짧은 혀 바람 되어

이승을 떠나 가나보다

평생 찌든 가난, 탁탁 털고 미련 없이

동굴 같은 지하 단칸 빠져나와

생전에 그리던 높은 빌딩

훤한 지붕에 올라

마음대로 밟아보고 얼쑤얼쑤 갔을까

평생 눈치코치 없다 쥐어박던 장씨부인

눈물 콧물 훔치며

소반에 사잣밥 한 공기, 간장 한 종지,

짚신 한 켤레, 지팡이 하나를 내놓으며

입속으로 중얼거린다


이제는 가난 같은 것

하나도 무섭지 않을게요

술독은 놓고 가시구려



海印寺 枯死木

                   (해인사 고사목)    /  안행덕 

 

 

해인사 초입에서 만난 거대한 고사목

천 년 고찰 지키는 수문장처럼

참 오랫동안 거기 서 있다

만 번뇌를 녹이느라 애가 말랐는지

속이 텅 비었다

 

                    남루한 가사 장삼 합장하고

묵언정진 천 년을 넘어

무릎이 무던히도 저리고 아플 터인데

꼼짝 않고 앉은 채

나를 천 년 미궁으로 밀어 넣는다


장구한 역사는 흘러갔어도

애장왕과 왕비의

아름다운 사랑이 아직도 그대로 살아

우물처럼 깊은 그리움

風景(풍경)처럼 열린 그 옛날

가던 발길 잡는다

 

 

소류지 蓮(연) / 안행덕



한여름 장맛비도 겁나지 않아요

이미 아랫도리 물에 젖은 채

석삼년이나 되는걸요.

가끔은 심술 난 바람이

멱살 잡고 흔들어도

진흙 속에서 절이고 삭인 이력으로

오욕칠정의 붉은 고뇌를

가는 허리에 묶어놓고

엷은 미소 동동 띄우면 그만인 걸요

팔자려니 하다가도

가끔은 불쑥 치미는 억울함에

남몰래 울기도 해요

짙푸른 어둠을 밀고 나와

환해지고 싶은 청춘이거든요

물에서 뭍으로 오르는 일이 천지개벽인 줄 알지만

날마다 소원을 담아 고운 꽃잎으로 피어요

 

 

2011년 계간 문학광장 가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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