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들의 감정 / 정와연
그것은 엉키는 방식에 따라
수십 가지의 무늬로 바뀐다
여름엔 숨고 겨울엔 나타나는 맨살의 감정이 있다
부푼 발등과 바람의 방향, 그리고 햇살의 끈
강풍의 힘으로 멀리 갔다 오는 여행이 있다
끈을 엮어 장식을 만드는 것은
매듭을 지나온 것들이지만
한철 풀리지 않고 감기는 줄기는 고집이 질기다
풀어지지 않는 매듭을 얻고
끊어지는 부분을 허락했다
작두콩들이 줄기를 신고 보폭을 재며 걷는다
잘려진 전파와 달팽이무늬
흩어지기 직전의 비행선을 풀어
가시와 소음을 골라내는 방식
코사지가 있는 것들은 나팔꽃줄기를 애용하고
거미줄은 몇 끼 식사를 보관해 둔다
옥수수껍질로 밑창을 깔고 그 수염을 꼬아서
발목을 두르면 하모니카 소리가 난다
매미는 갈라진 뒤꿈치를
날개로 감싸고 여름 한철을 운다
겨울의 장식인 맨발을 여름에 신는다
가장 앙상한 미학,
여름에 끊어지지 않던 줄기들
겨울바람은 툭툭 끊어지기 일쑤다
겨울은 샌들이 쉬어가는 계절
샌들은 나무에서 내려와 줄기가 된
진화론을 가지고 있다
겨울이면 샌들은 다 운동화 끈으로 바뀐다
원피스 감정 밑엔 샌들의 감정이 있다
'2013 신춘문예 당선시집'에서
낙과 / 정와연
낙과를 파는 코너에 길게 줄서 있는 사람들
낙과를 사기 위해 줄이라니
마치 과일나무 밑을 두리번거리듯
수풀을 헤치듯 서 있는 사람들
옛말에 낙식은 공식이라 했는데
어떤 마음이 저리 길어 파치 앞에 기다리고 있나
모두 한번쯤 낙과였던 기억이 있다는 듯
체온이 묻은 낙과를 손으로 받아보았다는 듯
줄을 서있는 태풍의 끝,
쓱쓱 닦을 준비가 되어있다는 듯
한 사람이 한 봉지씩 들고 얼굴이 환하다
낙과는 색이 변한 부위가 가장 물렁하다
물렁한 부분은 빠른 속도로 변한다
모두 자신의 물렁한 부분을 알고 있다는 듯
한 번 더 물렁한 부분을 만져보겠다는 듯
즐거운 배급,
한 사람이 열 개라면 열사람이면 백 개
위로하는 사람보다 위로 받는 사람이 그 배수倍數다
붉어지다만 낙과들이
그 어느 것보다 오늘은 상품上品이다
한낮의 위로의 줄이 길다
태풍의 긴 머리채가 휘감았던 나무 밑
굴러 떨어져 멍이 든 것들
아삭아삭 풋것 베어 무는 소리를 생각하면
그맛,
위로의 맛일 것이라는 것도 짐작하겠다
'2013 신춘문예 당선시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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