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표작

[스크랩] 엿 먹어라

湖月, 2010. 10. 3. 15:36

 

 

안행덕 / 돌



냇물 따라 구르다 멈춘 맨살

무심한 듯 멍청히 서 있네


역사처럼 켜켜이 쌓인 사연 

말없이 알몸을 드러내놓고


아무도 듣지 못할 속울음

그렇게 깨어져도 흘릴 피도 없는 걸


우주를 품고도 빛나는 삶은커녕

은근한 사랑 한 번 못해보고


치열한 전생(全生)을 구르다 깨어지는

아픔만 알게 되었나


 

 

 

안행덕 / 난설헌(蘭雪軒)에게



선계(仙界)를 그리며

갓 핀 부용처럼 수련처럼

애잔하게 피었다가

짧은 생을 애달게 울던 사람아

양유지사(楊柳枝詞) 흐르는 그대 거닐던 호반

눈썹 같은 버들잎 사이로

저고리 고름 풀리듯

대금 한 자락 휘감긴다.

호반에 어둠으로 묻힌 그대의 시간

하나 둘 일어나 나를 흔들고

호수를 흔들어도

선계의 도량 읽어내는 재주 없어

서럽기만 하여라


채련곡(採蓮曲)에서 연꽃 따 던져놓고

반나절 부끄럽다 하더니

이제는 애타는 그리움 없고

부용꽃 떨어지는 애절한 사연 같은 일 없을 터,

그래서 나도 그대 계신 선계를 그리워하네.

 

 

안행덕 / 엿 먹어라



더위 피해 동해 바닷가로 나들이 갔다

왁자지껄하며 떠드는 군중 속으로 슬쩍 끼어들었다

희한하다 

끈다리 여자 속옷 같은 치마 한 장 두르고

신나는 각설이패의 재주에

더위도 잊은 관중 박수소리 요란하다

우리는 거지가 아녀

우리는 종합예술가여

낡은 중고 악기는

좁은 빈터로 관중을 몰아넣는다.

품바가 금방 웨스턴 뮤직으로 바뀐다.

맞다 일인 4역 5역이다

여장남자들의 열연에 흠뻑 빠진 관중에게

농담 속에 진담 한마디

너무 힘들어

엿 좀 먹고 하자

엿판을 들고 나와

엿을 파는 저 젊은이들의 몸부림이

8월의 태양보다 뜨겁다

 

 

안행덕 / 도둑놈 가시



험한 숲을 헤쳐 나오니 바짓가랑이에

달라붙은 도둑놈 가시

언제 그렇게 감쪽같이 매달렸는지

그냥 털어서는 절대 떨어지지 않는다

집게손가락으로 하나하나 떼어내야 한다


숲 속에 숨어 있던 도둑놈 가시 같은 사람

조용한 내 마음에 확 달라붙은 그날부터

감쪽같이 바람처럼 보이지 않는 가시가 되어

무시로 지친 사랑을 뽑아내도 끝없이 아리다


나도 모르게 내 가슴에 들어온 시퍼런 독가시

아무리 흔들어도 털어내도 떨어지지 않는다

날이 가고 달이 갈수록

시퍼런 상처는 울음이 되어 매달린다

 

 

안행덕 : 호 호월(湖月). 《한국문인협회》 회원. 《부산문인협회》 회원. 《세계모던포엠》 회원.

퓨쉬킨 기념 문학상 수상. 황금찬 시 문학상 수상. 시집 『꿈꾸는 의자』 공저 시집 및 동인지 다수.

 

 

시산문 2010 가을

 

출처 : 문학 한 자밤
글쓴이 : 해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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