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의香氣

습작 / 정서정

湖月, 2015. 6. 4. 16:54

 

 

습작

         정서정


냉장고에 굴러다니던 귤 한 개
무심코 까먹다
새콤한 시알갱이 하나
톡 씹히는 느낌
그만 잇새에 끼었다
빼내려고 애면글면 혀 놀리다 
내 살만 깨물었다
샛노란 비명 시설스런 호들갑에
어리빙빙 얼얼한 혀
버벅거리다 겨우 뱉어낸
시큼털털한 변명 한 톨


정서정·(1954~ ) 서울 출생. 시집 『시(詩)를 건지러 간다』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 『모서리와의 결별』이 있음. 원광대 불문학과 교수.


*혹자는 창작(創作)의 고통을 산고(産苦)의 고통에 비유하곤 한다. 다소 과장이긴 하지만 그만큼 창작의 어려움을 토로한 것이리라. 시인들은 그런 고통과 인고의 과정을 거쳐 한 편의 시를 탄생시킨다. 그래서일까. 습작을 주제로 한 시들은 대부분 무겁거나 경건하거나 간곡하다. 한데 정서정의 「습작」은 조금 낯설다. 시 한 편이 전부 은유로 이루어진 것부터가 신선하다. 재치 있는 묘사는 덤으로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이다. 잇새에 낀 이물질을 빼내려고 혀를 놀리다 살을 깨물고 만 상황은 시인이 글이 안 될 때 머리를 쥐어뜯는 것과 같다. 그렇게 해서 겨우 뱉어낸 것이 “시큼털털한 변명 한 톨”이란다. 하, 이 대목에서 나는 무릎을 친다. ‘변명’이라는 말이 정곡을 찌른다. 그럼에도 시인은 시를 쓴다. 파먹을 건 자기 자신밖에 없으므로……. 

-고영(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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