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의香氣

강아지풀 / 길상호

湖月, 2018. 11. 16. 20:52

강아지풀       길상호


지난 세월 잘도 견뎌냈구나


말복 지나 처서 되어 털갈이 시작하던

강아지풀, 제대로 짖어 보지도 못하고

벙어리마냥 혼자 흔들리며 잘도 버텨냈구나

외딴 폐가 들러 주는 사람도 없고

한 웅큼 빠져 그나마 먼지 푸석한 털

누가 한 번 보듬어 주랴, 눈길이나 주랴

슬픔은 슬픔대로 혼자 짊어지고

기쁨은 기쁨대로 혼자 웃어넘길 일

무리 지어 휘몰려 가는 바람 속에

그저 단단히 뿌리박을 뿐, 너에게는

꽃다운 꽃도 없구나

끌어올릴 꿈도 이제 없구나

지금은 지붕마다 하얗게 눈이 내리고

처마 끝 줄줄이 고드름 자라는 계절

빈집에는 세월도 잠깐 쉬고 있는 듯

아무런 기척 없는데 너희만 서로

얼굴 비비며 마음 다독이고 있구나

언 날이 있으면 풀릴 날도 있다고

말없이 눈짓으로 이야기하고 있구나

어느새 눈은 꽃잎으로 떨어져

강아지풀, 모두 눈꽃이 된다

 

 -길상호 시집 <오동나무 안에 잠들다> 중에서

 


'詩의香氣'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검은 맛 / 박지영  (0) 2018.11.16
자국들 / 이재무  (0) 2018.11.16
호수 / 곽재구  (0) 2018.11.16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 함민복  (0) 2018.11.16
인연 / 복효근  (0) 2018.1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