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作

그림으로 쓴 역사책/ 안행덕

湖月, 2018. 5. 1. 10:34



그림으로 쓴 역사책 / 안행덕

            ( 반구대 암각화 )

 

 

태화강 상류 병풍처럼 펼쳐놓은 암벽 사이를 흘러가는

대곡천(川)은

몇 천 년 동안 암벽을 안고 돌며 역사 공부를 한다

선사시대 저 먼 옛날 맨살로 암벽에 매달린 수염 텁수룩한 남자를 만나고 벼랑에 그려진 그림 이야기를 들으며 돌돌 졸졸 외우며 흘러간다. 

 

옛날 옛적에 그 사내는 암벽에 그림을 그리고 쪼아내고, 긁어내고, 점으로 새기며 간절한 바람을 손가락 몇 개로 조율했을 돌도끼 소리 음률처럼 들리는데, 수염이 텁수룩한 남자는 목젖이 붇고 핏줄이 서고 손등이 터진 아픔을 견디며 혼신을 담아 이 역사책을 만들며 생명 없는 그림을 살려내려고 무당처럼 신을 불러들이고 주술을 걸고 기원하며 외줄을 타는 곡예사처럼 아찔하게 매달린 채 숙명처럼 망치질로 역사를 기록했는데

수염고래, 귀신고래, 작살에 맞은 고래, 새끼 밴 고래, 상어, 물개, 물범, 독수리, 늑대, 여우, 거북이, 멧돼지 표범, 너구리, 새끼 밴 호랑이, 함정에 빠진 호랑이, 교미하는 곰, 새끼를 거느린 사슴, 짐승을 잡는 사냥꾼, 작살 창을 든 사람, 배를 타고 고래를 사냥하는 어부, 그물에 걸린 물고기, 춤추는 남자. 악기를 부는 사람, 탈을 쓴 무당, 옷 벗은 남자, 여자의 뱃속까지, 배 속의 아이까지 남자가 아는 모든 것을 바위에 그림으로 새기며 후손을 염려하고 걱정했겠지 남자의 거친 숨소리 토해 낼 때마다 한 마리씩 한 사람씩 그림으로 살아나 역사책으로 들어간 이야기를 대곡천은 날마다 암기하며 우리에게 전하네

 

오늘도 반구대 대곡천 물살이 출렁일 때마다 바위에 새겨진 선사시대 생물들 잠시 우르르 벌떡 일어났다가 벼랑의 암벽, 그림책으로 다시 들어간다




시집 『비 내리는 江』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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