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신 / 김인육
1
김해 김씨 집성촌 우리 마을엔 눈빛 고운 사람들만 모여서 살았습니다.
아버지의 점잖은 기침소리에 어머니는 과꽃처럼 피어있었습니다.
밤마다 달맞이꽃이 수줍게 피어서 누나는 자꾸 아름다웠습니다
누런 어미 소가 해마다 엉덩이가 예쁜 송아지를 낳았기 때문에
우리 가족은 더욱 행복하였습니다
밤하늘 가득 초롱한 별들이 퐁당퐁당 물장구를 치며 흘러가면
우리 누나의 까만 눈망울도 금세 서늘해져서
별들이 참방참방 물방울을 튀기며 흘러가는 것이 다 보일 지경이었습니다
2
오월의 햇살이 보리의 연초록 머릿결을 수음하듯 매만지고 있었습니다.
뒷마당엔 감꽃들이 하얀 초롱을 나무 가득 켜고 있었습니다
언제 날아왔는지 뒷산 솔숲에서 뻐꾸기가 싱겁게 울어대었습니다
뻐꾹뻐꾹
솔바람에 묻어오는 뻐꾸기 소리에 문득 누나가 흔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연분홍 봉선화가 야트막한 토담을 따라 곱게 피어나고
뻐꾸기가 울 때마다
누나의 얼굴에도 봉선화 꽃이 슬쩍 피었다 사라지곤 하였습니다
3
뻐꾸기가 오월 한낮을 싱겁게 울고 간 어느 날
김해김씨 집성촌 우리 마을엔
이상한 소문이 개구리 울음처럼 개굴개굴 번지고 있었습니다
뒷마당엔 감꽃이 하얗게 피어 있었지만
아버지는 노을처럼 벌겋게 술만 드셨습니다
어머니는 여름꽃들이 몰래 피었다 졌기 때문에 오래 앓아누웠습니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대밭에서 자꾸 기분 나쁜 소리가 났습니다.
고운 열일곱 살 우리 누나가
키만 멀쑥한 수곤이네 둘째 형이랑
보리밭에서 잠을 잤다고
동성봉본 집안끼리 잠을 잤다고
바람이 불 때마다 대밭에서 쑥덕이는 소리가 났습니다
보리밭에서 잤기 때문에
빨간문둥이를 낳을 거라고 바람이 나에게 말했습니다
노란 문둥이를 낳을 거라고 대나무가 나에게 말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빨간 봉선화가 미워졌습니다
노란 달맞이꽃도 미워졌습니다
푸른 보리밭도 미워졌습니다.
그리고, 빨간 문둥이를 낳을까봐
우리 누나도 미워졌습니다
그러나 오월의 보리밭이 너무나 푸르렀기 때문에
누나를 보면 나는 자꾸 울고 싶어졌습니다
4
옥빛 스란치마에 얼굴을 묻고 누나가 울고 있었습니다
누나의 긴 울음소리에
토담에 기대어 선 봉선화가 하염없이 지고
어머니 모르게 피었던 뒷마당의 감꽃들이
방울방울 떨어져 내리고 있었습니다
송아지 눈망울 같은 누나의 크다란 눈망울이 너무 슬펐으므로
그날 밤은 푸른 별들이 참방참방
누나의 까만 눈동자 속으로 떨어지는 것도 보지 못하고
나는 잠이 들었습니다
꿈속에서는 뒷마당의 감꽃들이 날아와 하얗게 지고 있었습니다.
5
헛기침만으로 여름을 견디던 아버지는
저녁 노울을 등에 지고 물푸레나무를 베어오셨습니다
물푸레나무로 무얼 하시려는 것일까?
물푸레나무가 너무 곧게 자랐으므로 나는 더럭 겁이났습니다
저 나무론 도리깨를 만들면 제격이지
바람이 나에게 말했습니다
저 나무론 회로리를 만들어도 제격이야
대나무도 나에게 말했습니다
오오, 코뚜레를 만들지도 모르는 일이야
겁먹은 어미소가 나에게 말했습니다
회창회창한 물푸레나무의 용도를 아무도 요량할 수 없었으므로
우리는 모두 겁이 났습니다
누나가 빨간 문둥이를 낳을까 봐 겁이 났습니다
아버지는 그날 저녁
옆집 대건이네 아저씨를 불러 송아지의 코에다 끔찍하게도
푹하고 코뚜레를 뚫었습니다
송아지는 커다란 눈망울을 끔뻑거리며 버둥댔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음메 음메 울기도 하였으나 부질없었습니다
흑갈색 구유 위로, 짓밟힌 누런 깃 위로
초경 같은 검붉은 핏방울이
방
울
방
울
품어져 나왔습니다
그러고 보니 송아지는 어느새 커서 엉덩이에 포동하게 살이 오르고
가슴살도 뽀얗게 자라 제법 어미 소 같아진 걸 나만 모르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6
중소만큼 자란 송아지는 코뚜레를 해야 합니다
얌전하게 순치하려면 그 길밖에 도리가 없었습니다.
우리 누나는 밤새 울었습니다
누나의 긴 울음소리를 따라 일찍 가을이 왔습니다
가을이 와서 구곤이네 둘째형이 마을을 떠났습니다
서울로 간다고 바람이 나에게 말했습니다
인천으로 갈지도 모르지 대나무가 나에게 말했습니다
송아지의 머리 위엔 죽순 같은 뿔이 그립게 돋아났으나
코뚜레에 묶여 있었으므로 고독하였습니다
누나도 동부레기처럼 고독하였습니다
가을이 깊어갈수록
누나는 코스모스처럼 자꾸 목이 가늘어졌으므로
바람이 불지 않아도 위험해 보였습니다.
7
때 아닌 가을장마가 연 나흘간이나 비를 뿌리고 있었습니다
감당하기 힘든 장대비가 거짓말 같이 퍼부어
먼 산 그림자만 짚어내던 누나의 섬섬한 손가락이
적설에 겨운 청솔가지처럼
툭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내렸습니다
누나의 분홍 꽃신이 가을비에 휩쓸려 둥둥 떠내려가고 있었습니다
누나가 못쓸 약을 먹었다고 바람이 나에게 말했습니다
크윽 숨이 졌다고 대나무가 나에게 말했습니다
누나는 빨간 문둥이를 낳지 않았지만
변함없이 보리밭 위론 보름달이 둥글게 떠올랐으므로
어머니는 오래오래 앓아누워야 했습니다
치자꽃 하얀 향기로 꼬옥 껴안던
누나의 알싸한 가슴 냄새가 자꾸만 풍겨 와서
나는 꿈속에서 음매 음매 송아지처럼 울었습니다
8
누나의 꽃신이 가을비에 둥둥 떠내려간 이듬해에도
뒷산 솔숲으론 뻐꾸기가 날아와
뻐꾹 뻐꾹 누군가를 아프게 부르고
뒷마당엔 어머니 몰래 핀 감꽃들이
방
울
방
울
지고 있었습니다
나는 갑자기
모가지를 빳빳이 치켜세운 오월의 청보리가 미워져서
그 까칠한 목숨들을 그만 똑똑 꺾어버릴 양으로
움켜진 주먹으로 얼굴을 훔쳐대며
누나의 옥빛 스란치마가 나부끼는 그리움의 벌판으로 막 달려갔습니다.
시집 『 다시 부르는 제망매가』2004
김인육 시인
1963년 울산 산하에서 출생하였으며 1986년 경남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를 졸업하였다. 2001년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과정을 졸업하였고 2000년 ‘시와생명’ 신인상에 당선되었다. 2004년 시집< 다시 부르는 제망매가> " 강남시문학회 동인, 계간 <미네르바>편집위원" 현재 서울 양천고등학교 교사로 재직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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