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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구름이 쓴 글 / 조원
눈 어두운 먹구름이 빗줄기를
점자 치듯 쏟아 붓는다
강물 위로 글 쓰는 소리 추적추적 들리고
떨어지는 낱자를 짚어가며
물갈퀴로 물결 한 장씩 넘기는 새는
글을 먹고 자라는 몸
행간 마다 쉼 없이 날갯짓하는 새에게
오늘처럼 넘쳐나는 문장은
해독조차 어렵다
바람의 주정에도
웅성거리는 벌레 소리에도
좀체 속엣말 없던 구름 아니던가
새는 마지막 단락까지 단숨에 날아
먹구름의 근황을 알아보고 싶은 것이다
밝은 곳으로 걸음 한 적 없는
저 어둡고 답답한 심사 읽어내고
고개를 끄덕여 주고 싶은 것이다
그의 글이 떠내려간다
추 추춧 추 추춧
자맥질로 한 자씩 건져 올리는 새
꽃의 입관식 / 조원
반드시,
꽃의 시신만 전문으로 다루는 장의사여야 합니다
눕지 못하고 서서 죽은 꽃
편히 안치할 수 있도록 먼저 바람을 부르십시오
시중에 떠도는 잡배 바람은 밀치기부터 하지만
넘어질 때마다 일으켜 주는 바람도 있습니다
쓰러지지 않고 흔들린 이유가 거기 있지요
죽어서도 온전히 눕지 못한 목숨을
줄기부터 받침까지 바스러지지 않게 다뤄 주십시오
백년 된 오동나무 관에 입관하기 전
강물에 버들잎을 씻어 양손으로 꾸욱 짠 뒤
씨방이 헐거워 밑씨 빠진 암술부터
버짐 핀 꽃밥까지 고요히 닦여야 합니다
벌의 눈물과 나비의 애도를 촉촉이 담아
퍼석한 암술에 적셔 드리면 됩니다
억새 손길은 망자라도 아픈 법이니
핏덩이 다루듯 살살 문질러 주십시오
저기, 염을 위해 한 떼의 구름이 몰려오는군요
천 번을 탄 목화여야 부패를 막을 수 있습니다
환생할 수 있도록 뿌리마다 온기를 주세요.
조문객과 상주는 슬퍼하지 않아도 좋으니
강물 같은 곡소리만 자글자글 들려주십시오
나무들이 줄지어 가지를 흔들고 있군요
부디 잘 가시라고
<다시올문학> 2009. 여름호
조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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