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행덕 시 세계

범어사에서

湖月, 2025. 5. 11. 11:41

 

범어사에서 / 호월안행덕

​​

범어(梵魚)가 놀았다는 전설을 찾아

물처럼 바람처럼 길을 나섰네

바람결에 묻어나는 풍경소리 은은한

산문에 들어서니

몇 백 년 된 은행나무 소나무

행자처럼 읍소하며 나를 반기네

일주문 지나 사 천문 이르니

세속의 짐은 다 벗어놓고 왔느냐

눈 부릅뜬 사천왕 호령에 오금 저리며

불이문 보제루를 돌아서니

빛바랜 단청을 인 대웅전 부처를 품고

자비로운 아미타의 미소가 환하다

돌계단 하나에 세속의 연하나 내려놓고

또 한 계단 오르며 욕심 하나 버리니

빈 마음에 고요를 담아

슬며시 여민 옷깃

두 손 모아 삼천 배로 세속을 벗어버리니

절 마당 출렁이고 범어(梵魚)가 놀고 있네

 

바람의 그림자 / 호월 안행덕

 

 

천인賤人을 닮아서 서럽다고 운다.

제 그림자를 찾아서

얼마나 많은 길을 헤매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생의 언약도 없는 바람처럼

차창 밖 풍경처럼 지나가는 삶

눈 내리는 겨울밤 갈 길 잃는 빈 마음

어디로 가야 하나

 

사는 게 고단하지 않은 사람 어디 있으랴

같이 갈 이 아무도 없는 고행길

빛없는 어두운 밤에 그림자 잃은 영혼 되어

어디로 가야 하나

 

길 잃는 바람 같은 나, 오늘도

제 그림자 찾아 황량한 벌판에서

회오리를 꿈꾸는 바람이어라

 

 

해 질 녘 호숫가에서 / 호월 안행덕

 

내 마음에 드리운 안개 같은 그리움

물결도 잔잔한 호수에 비친 풍경처럼

물 위에 비친 내 그림자

눈물같이 서럽네

 

나는 지금 울컥 저물고 있다는 생각

가버린 계절과 청춘을 그리워함인가

미래가 두려운 건가

아직 나는 모르네

 

다만, 물에 비친 황혼의 아름다움에

피고 지는 생각 그냥 눈물이 나네

고요 속 하늘

조용히 내려와 지켜보는 이 한때

생불을 만나다 / 호월 안행덕

 

바람마저 합장을 하는지

절간처럼 조용한 외진 뜰 분재 화원

한 귀퉁이에 가부좌 틀고 앉은

소나무 분재盆栽

 

백열등을 향로처럼 머리에 이고

등신불처럼 자비로운 미소로

수행 중이다

 

사지를 철사 줄로 묶인 채 무아에 든 생불이다

소신공양하듯

두 눈 딱 감고 합장하며 화르르 제 몸 불사르고 있다

 

두 손 두 발 묶인 채

온몸에 거룩한 경전을 새기고 있다

 

억겁의 죄를 사죄하듯

잎마다 향을 피운다

 

어쩌다 꿈에 본 부처를 만난 듯

새순 잎마다 미소가 핀다

 

 

농월정(弄月亭) / 호월 안행덕

 

 

저만큼 높이 언제 올라갔는지 저~ 달

온화한 미소로 조용히 세상을 내려다보는데

정자 아래 너럭바위 사이를

조심조심 흐르는 여울에 빠진 저 달 보소

부끄러운 줄 모르고 발가벗고 미역을 감네

요염한 자태에 이미 할 말 잊은 나그네

달빛이 지어내는 시 한 수에 취해

달아 달아 이리 와 내 술 한잔 받게나

나그네의 희롱에도 눈썹 하나 까딱 않고

물가에 아찔하게 나신으로 누운 달

능청스럽게 명쾌한 시 한 수로 응대하니

정자에서 거드름 피우던 나그네

술에 취하고 월광에 취해서

오늘 밤 잠 못 이루겠네

섬 하나 품고 사는 여자 / 호월 안행덕

 

들끓는 폭풍처럼 밀려왔다

출렁이는 파도처럼 흔들리는

내 속에는

외딴섬 하나 있네

외로워 뒤척이던 물결 달래는

붉은 동백꽃 같은

섬 하나 품고 사는 여자라네

 

언제나 열려 있는 바다는

수평선에 젖은 잠을 풀어 놓고

섬처럼 외로운 나에게

꿈길을 열어주네

날개 하나 달아 주네

 

밤새운 고뇌가 지쳐 갈 지음

안개 같은 커튼을 열고

화려한 아침이 오네

미명으로 바다를 깨우네

조개무덤 / 호월 안행덕

주인을 잃어버린 빈집

누가 이렇게 무덤처럼 쌓아 놓았나

산처럼 모여 있어도 외로운가

가슴 열어 놓고 먼 산 바라기를 하네

 

세상에

뼈를 깎아 세운 아름다운 집

이렇게 고운 집에는 누가 살았을까

어느 누가 보쌈을 해갔는지 흔적도 없네

 

대문도 없는 빈집에 죽은 조개를 찾아온

바다를 건너온 바람이 조문하고

애도 곡 같은 파도 소리 따라

물새들 울음은 곡哭소리처럼 서럽네

애장터에서 우는 새끼 잃은 어미 같네

 

바람둥이 파도는 쉬지 않고

주인 없는 빈집을 슬쩍슬쩍

염탐하듯 들여다보네

 

꽃이 좋아라 / 호월 안행덕

 

꽃 진다고 서러워 마라

그 모습 그대로 다시 올 테니

약속하고 떠나는 그 모습 아름다워라

 

말없이 떠난 꽃 같은 그대

우연히든 필연이든 다시 만나리

약속을 지킬 줄 아는 꽃이 좋아라

 

무시로 흘러가는 세월에도

피고 지고 다시 피는 사랑아

속절없이 기다려도 좋아라

 

징검다리 / 호월 안행덕

 

멈출 수 없는 세월에 뒤질세라

쉬지 않고 흐르는 물도

가끔은 머뭇거린다.

물 위에 문신처럼 새겨진 돌을 만나면

저도 모르게 순해지는데

이쪽과 저쪽을 이어주는 징검돌의

부르튼 발 때문이다

 

누군가의 마른 발이 젖지 않고

징검징검 밟고 가라고

제 몸 통째로 제물로 바치고 침묵하며

흐르는 시냇물에 맨발을 숨긴 돌

 

물 위의 표정은 태연한 척하지만

물살에 헌(傷處) 발은 상처투성이다

통증으로 절룩거리면서도

제 소임을 다하려고 ​

나란히 서 있는 친구 손을 붙들고

물살에 떠내려가지 않으려 부르르 떤다

 

콩나물 / 호월 안행덕

​​

정갈한 제사 음식으로

콩나물 다듬는데

떼어낸 발들이 그 껍질과 어울려​

​자꾸만 물음표를 던지며

4분 음표를 그리고 쉼표를 찍는다

물만 먹고 자랐으니 심성이 착하디착하다

떼어낸 잔발들 서럽다 말하지 않고

깨끗한 음률을 만드는데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으면서

장중한 선율로 해도 곡을 쓴다​

뿌리 끝에 흐르던

물방울 소리 기억해 내며

미완의 교향곡을 다듬는다

시집 『바람의 그림자』에서

'안행덕 시 세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콩나물시루 속의 여자  (0) 2025.05.10
을숙도 현대 미술관  (0) 2025.04.08
백치여서 다행이다  (0) 2025.04.02
백치여서 다행이다  (0) 2025.03.15
갯그렁 같은 여자 / 호월  (0) 2025.0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