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밭 / 안행덕
아직은 동지섣달 엄동이라고
창문에 성에꽃 만발滿發한데
우리 집 거실에 들여놓은 보리밭 한 뼘
봄바람 불러들여 설레게 하네
웰빙 식품이라고 키운 보리 싹 한 줌
작은 화분에서 보리밭 한 이랑을 이루고
풋풋한 초록 잎으로 봄 풍경, 봄 냄새
싱그러운 봄을 그려내는데
눈감으니 드넓은 보리밭 위로
일렁이는 초록 물결 푸른 바람이 구르고
아련히 들려오던 그리운 목소리
삐리릭삐리릭 보리피리 소리로 들리네
철없는 아내 / 안행덕
아침 해가 뜨기도 전
남편 출근 준비 바쁜데
창가에 핀 문주란에 한눈팔다가
남편한테 쥐어박히는 소리 듣고
레인지 위의 국 냄비
들썩들썩
철없는 주인 여자
혼을 내는데
싱싱한 시어들
온몸을 도마 위에 뉘어 놓고
주인의 칼날을 기다리던 주어와 동사
생선처럼 팔딱팔딱 튀는데
철없는 아내
비우고 채워 넣을 여분의 백지 같은
앞치마에 젖은 손 닦으며
펜촉을 들어 막힌 혈을 틔우는데
돌이 될 것 같던 시어들
하나둘 살아나 피돌기를 하네
운명 / 안행덕
콩밭에서 콩대를 뽑다
유심히 보니
콩 뿌리가 뽑히지 않으려고
흙을 단단히 쥐고 파랗게 질려 있다
뿌리는 알고 있었나 보다
뿌리가 키운 콩과 콩깍지의 슬픈 사연
어두운 흙 속에 뿌리를 내릴 때
이미 정해진 콩과 콩깍지의 운명
너는 콩이 되고 나는 콩깍지가 되어
내 속에서 너 나왔는데
어머니 자궁 같은 콩대 줄기에
매달려있을 때 우리는 한몸이었는데
몰랐다
내가 불이 되어 너를 삶아댈 줄이야
폭설 / 안행덕
그리움 한 자락 끌고
꽃잎처럼 나비처럼 나풀거리더니
무념무상 하얀 맘이 목화송이처럼 커지고
소리 없이 훨훨 내리더니
동지섣달 긴긴밤을
걱정하며 다독이던 어미처럼
시린 세상 솜이불 덮어주려 하네
포근하게 세상을 덮어가네
마당도 장독대도 소복소복
산도 들도 하얗게
사랑도 눈물도 눈부시게
뒷골목 몰래 버린 불량 양심도 보이지않고
이승과 저승으로 가는 갈림길도 보이지 않네
온 세상을 새하얗게 지우네
고통도 지우고 걱정도 지우고
펑펑 퍼붓고 있네 소복소복 쌓이네
의병대장 신돌석
이웃과 나라를 사랑하는 일 해본 일 있는가
전설과 신화를 남긴 민족의 영웅인 그는
위세 등등한 고관대작도 의기양양한 양반도 아니었네
나라에서 받은 은덕도 없건만 나라가 위급할 때
몸 바쳐 내 나라를 구하겠다고 의병이 되었다네
총검을 터럭 다루듯 가볍게 만지고
축지법도 익힌 신출귀몰한 청년
지략은 뛰어나 제갈량(諸葛亮)도 울고 갈 신기로
백두대간 줄기를 타고 전설적인 무용담을 만들어 낸 그는
태백산 호랑이이라는 별명이 어울리는 사람이었지
민중을 물로 여기고, 유격부대는
그 속에서 헤엄치는 물고기와 같아야 한다는 사람
불타는 청춘 30세에 간자에게 저격당해
역사 속에 혼불로 남은 그대
일월산과 백암산 태백산을 내려다보는 저 하늘 별이 된 사람
애달픈 역사에 가슴 먹먹해도
내가 할 수 있는 게 고작
아~ 탄식하고 눈을 감는 일뿐이었네
산나리
간월산 간월골 지천으로 피어난 산나리
햇빛이 부서지는 눈부신 유월이 오면
그날의 함성을 기억하고 가슴 졸이며
남몰래 담아둔 사연들 점점이 남아있네
아무것도 감출 수없어
민낯이 수줍어 살짝 수그린 얼굴
외로운 산골에 무덤도없이 쓸쓸히 묻힌
애틋하게 그리는 어린 영혼 붉은 피
포성도 비명도 삼켜버린 가여운 산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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