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작

열대야

湖月, 2016. 11. 12. 11:42



열대야 / 안행덕

 

 

익을 대로 익은 여름이 기어이

한증막 한 채 지어 놓고

온종일 지표를 달군 태양도

지쳐서 어둠을 베고 누웠다

내 손을 잡은 끈적한 여름

절절 끓는 한증막 속으로

나를 사정없이 밀어 넣는다

헉헉거리는 여름밤

온종일 시달리던 선풍기도 절룩거리고

열기를 이기지 못한 TV도 횡설수설

여름의 여왕 죽부인마저 맥없이 자리에 누웠다

며칠을 신열로 앓아누운 대지가, 훅

내 뿜는 한숨

절절 끊는 가슴앓이가 

도시 전체를 뜨겁게 달군다

 


8월이 오면 / 안행덕

 

넓은 무대에서

멋진 왈츠를 추는 하얀 파도처럼

너와 나 추억의 공간에

푸른 바다를 펼치고 춤을 추리라

태양이 포옹하고 간 뜨거운 백사장 

그대와 약속했던 바다로 가야겠다

 

세월이 갈수록 외로워지는 흔들림

그리웠던 순간들 하나하나 불러내

그때 못다 한 이야기

밀려오는 파도와 이 밤을 지새우리라

하얗게 새우리라 

가슴이 따듯해 질 때까지 


 


형산강 달 아래서

 

 

영일만으로 천천히 흘러가는 형산강

말없이 강 언저리 서성이던 달빛

세상에 은빛 가루를 뿌리다가 

댓가지 풀잎에

보일 듯 말듯 묵화를 그리며

강물따라 흘러서 간다

 

형산을 돌아돌아 흘러가는 강물처럼

굽이굽이 돌아온 인생 길

나의 긴 여정 중에 한순간

달빛에 젖어있는 강물이어라

허물어지는 마음 달래며

형산강에 황포 돛단배 한 척 띄운다

 

마네킹과 수습생 / 안행덕

 

 

 

부스스한 머리를 통째로 내 맞기고

옴짝달싹 못하는 신세

머릿밑은 피멍이 들어 울고 싶다네

오늘도 달아나고 싶은 충동을 수십 번 참아내는데

목디스크는 치료될 기미도 없이 삐거덕거리고

아픔이 무언지 사랑이 무언지 관심 없는

여자와 동거하는 게 쉬운 일 아니네

 

날개가 있다면 날아갈 텐데

다리가 있다면 달아날 텐데

유영하듯 허공에 흔들리는 샹들리에

탈출을 꿈꾸는 마네킹을 유혹하고

 

달콤한 수액을 탐닉하듯

수습생 손끝은 마네킹 머리를 훑어내린다

머릿밑 표피에 찌릿한 전율 느낄 때

등골이 오싹하여 두 눈 딱 감았다가 뜨는데

그를 내려다보는 열정으로 꽉 찬 두 눈빛이 빛난다

 

청보리

 

영하의 강추위 춘풍으로 달래도

바람 손 보리밭을 흔들고 지나가면

청보리 파래진 입술 파르르 떨고 있네.

 

밭이랑 사이마다 피어난 그리움들

들판의 저 푸른빛 내 유년 거기 있네

푸른 꿈 가슴앓이로 흔들리던 옛 추억

 

들판은 그대로인데 내 청춘 간곳없고 

세상사 까칠해도 지난날은 달콤해라

청보리 익어가는 봄 비바체로 흔드네 

 

 

밤꽃 / 安幸德 

 

 

하얗게 피어나던 오뉴월 *밤느정이

앙다문 고 가시내 야무진 입술처럼

향기로 가득한 꽃술 정인처럼 수줍다

 

달빛처럼 내게로 온 은은한 밤 향기

노을처럼 익어가는 그 사랑 다디달다

밤에만 더 그리워서 밤꽃이라 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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