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레가운다 / 안행덕
거친 손 지친 졸음
목화송이 놓지 못하고
밤새워 울어대는
물레와 같이 우는 건
목화밭 엉킨 실타래
풀지 못한 가슴앓이
이탈 [離脫] / 안행덕
메마른 아스팔트
길 잃은 달팽이 혼자
제 몸보다 큰 집을 이고
느리게 기웃거린다
꿈처럼 아득한 길을
본향[本鄕] 찾아 헤맨다
새 달력을 걸며
乙未年 새해가 밝았습니다
요원한 것 같던 어둠을
가로질러 온 새해가
다시 살아보라고 꼬드깁니다
홀로 가는 외로운 여행길
먼 듯 멀지 않은 여행길
또 한 정거장을 지났습니다
늙어 가던 노쇠한 꿈
다시 발돋움해보라
은근슬쩍 열두 달을 내려놓고
수줍은 듯 벽에 기대섰습니다
홀씨처럼 작은 소망하나
아직은 차마 날려 보내지 못하고
또 새 달력에 매달았습니다.
장 기연 선생님을 보내며/안행덕
나는 그대 소식 듣고 마음이 하얗게 되어
어디를 향해도 적막한 마음뿐이라오
빙설氷雪처럼 차가워지는 고독으로
얼어붙은 내 한숨 소리 들리나요
타오르던 연정戀情의 추억은
차디찬 밤바람에 멀어져가고
밤이 깊어 갈수록 그리움은 쌓여만 가는데
눈물로 살아나는 그대 향기
내 가슴에 꽃으로 피어나 웃고 있구려
만나면 먼저 손 내밀던
속 깊은 인정에
내 가슴이 따뜻해지던 장 기연 선생님
이제 언제 그 손 다시 잡아 볼 날 있으리오
기나긴 밤 미련未練에 취해서
파랗게 멍들어 가는 지인들이 있다는 걸 기억해주오
이승과 저승이 지척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쓸쓸한 마음에 한없이 멀어져가는 임이여
조금 먼저 간다고 너무 서러워 마오
얼마 지나면 다시 만날 날 있으리다
잘 가오. 장 선생님
빛과 그리고 그림자
어둠과 어둠 속에서
한 발을 내딛는 게 얼마나 힘든지
캄캄한 절망을 견뎌낸 사람은 알지
어둠의 휘장을 활짝 걷어내고
바다를 건너고 들판을 가로질러
진군하는 군대처럼 세상을 다 점령한 너도
찬란한 그 빛을 잘라먹고
태연하게 누운 그림자
적요(寂寥)를 즐기며
싸릿대 끝에 앉아 조는 잠자리
그 작은 그림자 하나도 밟지 못하는
눈부신 태양
찬란한 빛과 그리고 그림자
어둠이 방해하지 않는다면
필경(畢竟) 아름다운 풍경이지
봉숭아
첫사랑 설렘처럼
잠 못 이루고
하얀 밤으로 지샌
별 바라기 그리움
반달 손톱 물 들이던
젊은 날의 여름밤
순수가
꽃물 되어서 내려온 달빛인가
잠행潛行
이제 와 돌아보니
잠행이었네
태어날 때 여봐란듯이 고고성으로
태양처럼 눈부신 출발이었지
빛나는 젊음은 순간이고
걷다 보니 어둠으로 들어서고
길 잃은 나.
노상에서 멍하니 서 있네
지나온 길 돌아보니 아득하구나
저만큼 보이는 본향의 길
반갑기보다는 서러운 이맘
따라오던 그림자 사라지고
체념한 나 지그시 눈을 감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