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의香氣

빗방울에 대하여/ 나희덕

湖月, 2009. 7. 2. 09:17

 

빗방울에 대하여

나희덕

 

 

1

빗방울이 구름의 죽음이라는 걸 인디언 마을에 와서 알았다

빗방울이 풀줄기를 타고 땅에 스며들어

죽은 영혼을 어루만지는 소리를 듣고 난 뒤에야

 

2

인디언의 무덤은

동물이나 새의 형상으로 지어졌다

빗방울이 멀리서도 길을 찾아올 수 있도록

 

3

새 형상의 무덤은 흙에서 날고

사슴 형상의 무덤은 아직 풀을 뜯고 있다

이 비에 풀이 다시 돋아날 것이다

 

4

나무들은 빗방울에게 냄새로 이야기한다

숲은 향기로 소란스럽고

오래된 나무들은 빗방울의 기억을 털고 있다

 

5

쓰러진 나무는 비로소 쓰러진 나무다

오랜 직립의 삶에서 놓여난

나무의 맨발을 빗방울이 천천히 씻기고 있다

 

6

빗방울은 구름의 기억을 버리고 이 숲에 왔다

그러나 누운 뼈를 적시고

다시 구름과 천둥의 시절로 돌아갈 것이다

 

7

구름이 강물의 죽음이라는 걸 인디언 마을에 와서 알았다

죽은 영혼을 어루만진 강물이

햇빛에 날아오르는 소리를 듣고 난 뒤에야

 

 

 

야생사과

나희덕

 

 

어떤 영혼들과 얘기를 나누었다
붉은 절벽에서 스며나온 듯한 그들과

목소리는 바람결 같았고
우리는 나란히 앉아 지는 해를 바라보았다

흘러가는 구름과 풀을 뜯고 있는 말,
모든 그림자가 유난히 길고 선명한 저녁이었다
  
그들은 붉은 절벽으로 돌아가며
곁에 선 나무에서 야생사과를 따주었다

새가 쪼아먹은 자리마다
까만 개미들이 오글거리며 단물을 빨고 있었다

나는 개미들을 훑어내고 한 입 베어 물었다
달고 시고 쓰디쓴 야생사과를

그들이 사라진 수평선,
내 등 뒤에 서 있는 내가 보였다

바람 소리를 들었을 뿐인데 
그들이 건네준 야생사과를 베어 물었을 뿐인데

 

 

 

-나희덕 시집 <야생사과>, 창비,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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