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의香氣

병뚜껑/ 송찬호

湖月, 2009. 7. 4. 16:20

 

병뚜껑 / 송찬호



분명 저 여자는 그 동그란 입술을
재빨리 닫지 못했던 것 같다 삽시간에
그 육체의 더운 내용물이 흘러나와버렸으니

어느 목격자는 저 여자에게 갑자기 사슴이
뛰어들었다고 말했다 급하게 숨을 곳을
찾기 위하여 그 사슴이 저렇게 피로 변했다고
구경하는 사람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게 무지막지한 자동차가 함부로
저 여자에게 뛰어들었다고 생각할 순 없는 일이야

여자의 꺾여진 목은 유난히 희고 깨진
무릎 위로 하얀 레이스의 속옷이 얼핏 보인다
가슴 앞 단추들은 그 육체의 파탄에도
흩어지지 않고 여전히
가지런하고 완강하게 붙어 있다
그렇다 저 육체는 어떤 경우에도 저렇듯 품위와
자제력을 잃지 않도록 준비되어 있었다

그러고 보면 인생은 탄식의 연속인 것이다
저처럼 한마디 비명으로 삶이 끝날 수 있는데도
놀라움과 기쁨과 슬픔 따위의 육체의 서랍을
그토록 많이 달고 열어 보여줄 수 있으니

그리고 횡단 보도 밖으로 튕겨나간 저 하이힐을 보라 참 신기한
구름이기도 하다 조금 전까지 어떤 처녀의 발을
사로잡던 마술 상자였던 자신을 까마득히 잊은 듯
도로 옆 화단에 처박혀 콧등에
앉은 나비와 희희낙락하고 있으니

누군가 앰블런스를 부른다
우선 저 여자를 덮을 시트가 필요하다
얼굴만이라도 덮을 모자도 좋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때,
그 동그란 입술을 덮을 만한
병뚜껑이 운명의 손길이 닿는 곳에 있었어도......,
나는 그 병뚜껑만도 못한 시를 옆에 놓고 지나간다

 

출처/ 웹월간詩 [젊은시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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