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의香氣

선집/ 4편

湖月, 2018. 1. 1. 14:37


안행덕 대표시



난설헌(蘭 雪 軒) 에게

    

 

선계(仙界)를 그리며

갓 핀 부용처럼, 수련처럼,

애잔하게 피었다가

짧은 생을 애달게 울던 사람아

양유지사(楊柳枝詞) 흐르는 그대 거닐던 호반

눈썹 같은 버들잎 사이로, 저고리 고름 풀리듯

대금 한 자락 휘감긴다 

  

호반에 어둠으로 묻힌 그대의 시간

하나둘 일어나 나를 흔들고

호수를 흔들어도

선계의 도량 읽어내는 재주 없어

서럽기만 하여라

 

채련곡(採蓮曲)에서 연꽃 따 던져놓고

반나절 부끄럽다 하시더니

이제는 애타는 그리움 없고

부용 꽃 떨어지는 애절한 사연 같은 일 없을 터  

(그래서)

나도 그대 계신 선계를 그리워하네

 

 

 

수의를 짓다

 

떨리는 손으로

어머니 수의를 짓고 있습니다

머지않은 날, 홀연히 가신다기에

노란 안동포 삼베 한 필 끊어다

어여쁘신 날개, 수의를 짓고 있습니다

빈손으로 왔으니 빈손으로 가야 한다고

주머니조차 만들면 안 된다 하십니다

이승의 맺힌 마음 저승으로 가져가면 안 된다고

매듭을 지어서도 안 된다고 하십니다

실 끝을 옭매지도 말라 하십니다

치자열매 노란빛 흘러나오듯

어머니 지나오신 발자국

눈물에 번져 흐려집니다

마디마디 한 많고 설움 많은 세월 

맺힌 한 차마 놓지 못하시고

눈꺼풀 무겁게 붙들고 계십니다

가볍게 한세상 접고, 훨훨 날아오르시라고

금빛 날개 고이 달아

어머니 수의를 짓고 있습니다

   


항해

 

 

검은 고무 튜브에 하반신을 감추고

납작 업들인 채 헤엄을 치는 사내

하반신의 폐허에 도마뱀 꼬리처럼 돋아난

고무 지느러미 흔들며 시장통을 유영한다

오물이 질펀한 바닥에 쉼표를 찍고 행간을 치는 사이

퍼렇게 날이 선 시선(視線)들

두려움에 떠는 작은 심장을 인정 없이 냉각시킨다

파도처럼 밀려왔다 밀려가는 인파

뱃고동처럼, 발걸음 소리만 울릴 뿐

등대 같은 적선의 빛은 없어라

진종일 사나운 파도에 지친 시린 눈빛

안쓰럽게 지켜보던 좌판의 노파

끌끌 혀를 차며 지폐 한 장 던진다

좌초될 듯 흔들리던 고무 지느러미

그제야

두려움 없이 인파를 헤치며 거친 바다를 건넌다

 

 

   

늙어가는 오후 



안방에 누워 떨리는 눈으로

힘겹게 토방을 기어오르는

햇살 잡고 흔들어본다


한때는 탄탄한 토담 같던 육신(肉身)

비바람에 씻기어

흙으로 가려 헐리는 중이다


안방의 기척을 살피던

감나무에 걸린 까치밥

붉은 조등(弔燈)처럼 불을 밝히려 한다

 

몸 뒤집는 산 그림자

조용히 꼬리를 감추며

어둠이 집어삼키는 것을 보고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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